한낮의 태양 아래, 높은 언덕을 한달음에 올라온 탓일까? 아이들의 얼굴은 한눈에도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자유의 여신상 옆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이름으로 팔았던 깔리포를 사서 줬다. 바르셀로나에서도 먹었던 그 제품이다. 나 역시 투명한 물방울 가득 맺힌 차가운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부다페스트 시내를 내려다보며 마시는 맥주 한 모금이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적셨다.
시타델라에서 오분 정도 내려오자 잔디가 넓게 펼쳐진 공원이 있었다. 파란 잔디밭 위에 둥글게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헝가리 청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내가 대학에 다니던 우리나라의 9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나 보던 풍경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앞에는 하얀 막걸리병이 놓여 있었지만 이곳 헝가리 청년들의 손에는 플라스틱 커피잔이 들려있다는 정도였다. 겔레르트 언덕의 높고 투명한 하늘과 헝가리 청년들의 싱그러운 젊음은 닮아 있었다.
아름답고 여유로웠던 겔레르트 언덕의 공원
"아빠 유람선 타러 가요."
내일 프라하로 떠날 일정을 위해 일찍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있는데 혁우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네가 안 타고 싶다고 그랬잖아."
"갑자기 타고 싶어 졌어요."
"지금은 내일 떠날 짐도 챙겨야 하고 날도 어두워져 힘든데... 어떡하지?"
"우리 유람선 한 번도 안 타봤잖아요. "
"넌, 타자고 할 때는 안 타고..."
"아빠, 모처럼 혁우가 타자고 하는 거니 한번 타러 가요. 짐 챙기는 거 우리도 도울게요."
귀찮고 짜증 났지만 일우까지 나서는 통에 못 이기는 척 숙소를 나섰다. 아이들 핑계를 대긴 했지만, 파리, 프라하와 함께 유럽의 3대 야경으로 꼽히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이대로 못 보고 가는 것이 나 또한 아쉽기도 한 까닭이었다.
어제 구입한 교통권을 모두 사용했었기에 새로 표를 구입하여야 했다. 자동발매기 메뉴에서 어린이용 교통권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성인용 6회권을 구입했다.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유럽 대륙에서는 최초로 건설된 부다페스트의 전철을 타고 다시 뵈뢰슈머르티(Vörösmarty tér) 역에 내렸다. 화려한 불빛이 넘실대는 두나 강변에는 이미 수많은 관광객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관광객들 사이에서 승객을 모으는 유람선 호객꾼의 모습들이 파도 위에 솟은 등대처럼 보였다.
"한국사람이죠?"
유람선 매표소가 있는 10번 승강장 근처에서 금발의 잘생긴 헝가리 청년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놀랍게도 그의 말은 영어가 아니라 한국말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계속 한국말로 흥정을 해왔다.
"싸게 해 줄 테니 우리 배 타요."
"얼마예요?"
"2000 포린트만 내세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1 포린트에 4원이 조금 넘는 현재 환율로 계산하면 세 명의 승선료가 만원도 안 되는 셈이었다. 너무도 저렴한 승선료에 일단 그의 배에 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승선료 결제를 현금으로만 해야 했던 것이었다. 내일 프라하로 떠날 예정인 우리는 숙소로 들어오기 전 헝가리 돈을 모두 써버린 상황이었다.
"혹시 유로화나 카드는 안 되나요?"
"그건 안되고요. 요 앞에 ATM기가 있으니까 거기서 돈을 찾아요."
청년은 친절하게 ATM기의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그 순간, 의심이 생겼다.
'혹시 이거 싼 가격을 미끼로 카드를 복제하는 거 하려는 것 아냐?'
"아빠, 왜요? 우리 유람선 안타요?"
"응? 자, 잠깐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를 보며 연신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헝가리 청년을 믿어보기로 했다. ATM기로 향했다. 여기서 그만두기에는 가격 조건이 너무 좋았다. 현금지급기의 카드 투입기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인터넷에서 보았던 어떤 특이한 장치 같은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이곳 말고 다른 현금지급기가 있을까 싶어 둘러보았지만 발견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청년이 말했던 승선시간이 임박했기에 그냥 돈을 뽑기로 결정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오늘은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즐기기로 했다.
유람선에서 본 부다왕궁의 모습
유람선에서 바라본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다. 우리 옆에서 조용히 혼자 셀카를 찍고 있던 백인 아가씨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아까부터 우리가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 누군가 자신을 찍어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곧바로 내게 카메라를 건네며 환한 웃음으로 포즈를 취했다.
'역시 누군가 찍어주길 기다리고 있었구나.'
사진을 찍어 주자마자 그녀는 부탁도 하기 전에 우리들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녀 덕분에 두나 강의 빛나는 야경을 배경으로 부다페스트 마지막 밤의 추억을 가득 담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