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의 요새- 겔레르트 언덕- 시타델라
11살 일기
통나무에 갇혀 가시에 찔려 죽은 선교사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아팠을 것 같다. 선교사가 불쌍했다.
9살 일기
피곤하다.
아침 일찍 어부의 요새로 향했다. 어제 한 번 타 봐서 익숙해진 지하철을 이용해 볼까도 싶었지만 되도록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기에 오늘은 버스를 탔다. 여행지의 생생함을 느끼기에는 그 도시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만큼 좋은 체험은 없었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며칠 전, 이곳으로 오는 기차에서 만났던 시끄러운 할머니와 청년 같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적인 면만을 보고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역시 섣부르고 위험한 일이었다.
어부의 요새는 이름과 달리 전쟁을 위한 요새가 아니었다. 20세기 초에 헝가리의 세종대왕 격인 '마차슈 후녀디' 왕의 이름을 딴 마차슈 성당을 보수하면서 만든 성당의 부속 건물이었다.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 건물의 자리에 성벽이 있을 무렵, 다뉴브 강의 어부들이 성당을 방어했던 임무를 수행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디즈니랜드의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고깔 모양의 아름다운 7개의 탑은 영웅광장에서도 보았던 헝가리 건국신화 속의 마자르 7개 부족을 상징하는 것이다. 탑의 고깔 모양은 그들이 이동할 때 사용했던 천막의 모양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어부의 요새를 관람하고 나온 맞은편에 생뚱맞게도 스타벅스 커피숍이 있었다. 그것보다 더 놀랐던 것은 스타벅스가 위치한 건물이 바로 힐튼 호텔이라는 점이었다. 헝가리가 공산체제였을 때 지어진 건물로 세계의 힐튼 호텔 중 가장 아름다운 호텔로 꼽힌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불국사나 경복궁 같은 유적의 한가운데에 현대식 호텔을 지은 셈인데, 공산당 독재 시기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을 일이었을 터였다. 미국의 프랜차이즈 호텔이 우뚝 서있는 바닥의 밑에는 지금도 미처 발굴되지 못한 중세 도미니코 수도원의 유적이 햇볕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해발고도 220m에 불과하지만 부다페스트에서는 가장 고지대인 겔레르트 언덕과 그 위에 놓인 건축물 시타델라로 향했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겔레르트'라는 이름은 언덕 중간에 십자가를 들고 서있는 동상의 모델이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슈트반 왕의 기독교 포교활동에 도움을 주다가 반란세력에게 붙잡힌 선교사다. 겔레르트를 잡은 반란군은 통나무 안쪽에 수많은 못을 박은 통에 그를 가둔 후 언덕에서 다뉴브강을 향해 굴려 떨어뜨렸다고 한다. 아무리 신을 위한 순교였다지만 몸의 중심을 잃은 채 온몸의 피부가 바늘에 찔리고 찢겼을 겔레르트의 고통을 떠올리니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 아빠, 옛날 사람들은 정말 잔인했던 것 같아요. "
겔레르트의 이야기를 해줬더니 일우가 얼굴을 찡그리며 몸서리를 쳤다.
" 옛날에는 이것 말고도 사지에 줄을 묶은 후 사방으로 몸을 찢어 죽이는 것 같은 잔인한 처형 방법이 많았어. 후대에 등장한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이나 목을 자르는 길로틴 같은 방법은 오히려 인권을 고려한 측면이 있어."
" 목을 자르는 게 인권을 위한 거였다고요? "
놀래는 일우의 얼굴에 대고 차마 죄수들을 기름에 산채로 튀기거나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이어서 할 수는 없었다.
참고로, 시내 중심에 위치한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 성이슈트반 성당 내부에는 이 겔레르트를 시켜 기독교를 전파하게 한 이슈트반 왕의 오른손이 수백 년 동안 유리관 속에 그대로 보존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겔레르트 정상에 있는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 뒤로 '작은 도시'라는 의미의 시타델라 건물이 있었다. 헝가리를 점령했던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각각 이곳에 대포를 배치해 시가지를 감시했다. 건물 옆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은 소련, 지금의 러시아가 나치 독일을 축출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헝가리 시민들이 이 자유의 여신상이 나치 독일에서의 자유를 의미함과 동시에 소련에의 종속을 의미함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련은 이곳 시타델라에 탱크 부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이곳의 탱크들은 헝가리 시민들이 소련에 대항해 독립을 외쳤을 때, 부다페스트 시내를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한다. 자유의 여신상은 지금도 여전히 헝가리 국민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소련의 심장이었던 모스크바를 향해 무심하게 두 팔을 들고 서있었다.
시타 델라 성 벽에는 부다페스트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여러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1988년 서울 올림픽 200미터 배영에서 최연소로 우승을 했다는 크리스티나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사진 속에 나온 서울이라는 영문 표시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아빠, 저 사진 찍은 곳이 정말 서울이에요?"
"응, 그때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거든."
지금 혁우의 나이인 아홉 살에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다. 그 후 나랑 친구들은 줄곧 올림픽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모두가 올림픽만 무사히 치르면 우리나라가 금세 선진국이 될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시기였다.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때 코흘리개 꼬마였던 내가 이렇게 어린 두 녀석을 데리고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저 사진 속의 크리스티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혹시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시타델라에 관광을 온 중년 여성들이 모두 크리스티나처럼 느껴졌다.
시타델라 위에서 한가롭게 흐르고 있는 두나 강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두나 강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에르제베트 다리가 보였다. '에르제베트'는 미모로 유명했던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부인'씨씨'의 본명 '엘리자베트'의 헝가리식 표기였다. 그녀의 이름을 딴 뮤지컬 '엘리자벳'도 유명하다.
에르제베트 다리 바로 밑에는 '자유의 다리'가 있었다. 다리의 원래 이름은 그녀의 남편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이름을 딴 '프란츠 요제프 다리'였다. 황제의 이름을 딴 다리의 이름은 독립을 상징하듯 '자유의 다리'라고 단호하게 바꿔버린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정작 그 부인의 이름을 딴 다리의 이름은 바꾸지 않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헝가리 사람들 역시 오스트리아 사람들처럼
미모의 씨씨, 에르제베트만은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