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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Jan 26. 2023

제발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 주세요.



영어권 국가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교포 가족이었다. 엄마가 앞에 안고 있는 아기는 연신 발버둥을 치며 우리 아이들의 좌석을 발로 차고 있었다. 두 돌도 안된 아기가 이 좁은 공간을 어른처럼 버티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다. 다행히 중학생 아들들은 아직까지 그리 싫은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나 역시 저 맘 때의 아이들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 봤던 경험이 있었기에 아기 엄마의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문제는 엄마가 안고 있던 아기가 아니라 형으로 보이는 창가 쪽에 앉은 아이였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계속 영어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이가 말을 하는 것까지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엄마가 아이와 큰 목소리로 대화를 하며 웃거나 심지어 아이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을 거는 행동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Wow, look at the sunset!!
It's amazing!
There are many apartments!
How many planes are there?


대체로 이런 식의 대화였다. 조용했던 기내는 모자만의 영어 유치원으로 변했다. 아이를 위한 영어 수업은 영어와 한국어가 번갈아 사용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이톤의 영어가 기내의 조용한 공기를 쉴 새 없이 찢어대고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다소 시끄러워지자 엄마도 그제야 기내의 조용함을 의식했는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경고했다.


I feel you are very rude now!
Be quiet!


'제발요. 아기 엄마, 우리가 듣기엔 엄마 목소리가 제일 시끄러워요. 제발 아이에게 먼저 말을 걸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언제나처럼 속으로만 외칠 뿐이었다.

나 역시 저맘 때의 아이들을 키워 본 아빠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앞쪽에서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저쪽 엄마는 조용히 아이를 달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소변이 마려워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대각선 옆자리의 여자분이 내 쪽을 사나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관통해 내 뒷자리 아기 엄마를 향한 레이저였다.

"응애애!!!"

내가 일어서자 뒷자리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아기 엄마가 달랬지만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줌마 한 분이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아기엄마 제발 아기를 서서라도 안아."


아기 엄마의 옆에는 할머니로 보이는 분도 앉아 있었지만 어쩐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아기의 형이 작은 애의 자리를 발로 찼다. 잠 잘자던 작은 애가 어리둥절하며 깼다.


Stop kiking!


엄마가 아이에게 소리쳤다.


내게는 이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얼른 화장실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돌아와 앉았다. 설상가상 이번에는 아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황당했지만 엄마가 곧 아이를 말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의 흥겨운 영어노래는 멈출 줄을 몰랐고 엄마는 무슨 생각인지 아이를 내버려 두고 있었다. 내 대각선 옆 자리 여성이 다시 한번 내 쪽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의  무서운 눈빛에는 절로 긴장됐다. 다른 승객들도 하나 둘 노래 부르는 아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행기 뒤 쪽에 있던 승무원에게 다가가 조용히 귀띔을 했다.


현재 아이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어서 나를 포함한 다른 승객들이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자리가 어디시죠?
48d요


내가 먼저 가면 승무원이 뒤를 따라올 줄 알았다. 하지만 승무원은 나를 앞서 갔고 내가 그녀의 뒤를 따라 자리에 앉으려 하자 나를 보며 물었다.


뒷좌석에 앉은 저 승객분 맞나요?
아... 예.


당황한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설마 승무원이 아기엄마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물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승무원이 뒷좌석 아기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뭔가를 말했다.

"예, 알겠어요."

뒷좌석 아기엄마가 짧게 대답하는 것이 들렸다. 잠시 후, 다행스럽게도  아이의 노랫소리가 멈췄다. 


젠장, 고자질한 게 걸리고 말았다.,.
승무원님,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요? 그래서 엿 먹으라고 일부러 그런 건가요?


일이 있고부터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내 뒤통수를 아기 엄마가 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역시 괜스레 나서는 게 아니었다.


거의 마지막 번호였던 우리는 사람들이 모두 내린 후에 내리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내리면서 뒷좌석 엄마가 있던 자리를 우연히 보게 됐다. 그녀의 자리 바닥에는 기내 팸플릿과 과자 봉지, 휴지와 같은 잡동사니들이 너저분하게 뒹굴고 있었다. 모습에 이해심이 부족했던 건 아닌가 하는 일말의 고민마저 말끔히 사라졌다.


더불어, 그녀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외국 비행기에서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만 써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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