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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평상 Aug 13. 2019

형제들,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다-1

인스브루크 쿠타이 스키장

11살 일기

드디어 알프스에 스키를 타러 왔다. 열심히 연습해서 스위스에서 만난 그 형처럼 멋지게 스키를 타고 싶다.


   

9살 일기

나는 스키 천재다.


스키를 타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다.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근처에 있다는 스키 렌털 샵을 찾아갔다. 직원에게서 받은 종이지도가 있었지만, 종이지도를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결국 익숙한 구글 지도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헤맨 후에야 골목 뒤에 위치한 렌털 샵을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구글 지도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여행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샵 안에는 스키 장비를 빌리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주인은 친절하게 장비에 대한 설명을 해주며 장착을 도와주었다.


" 어디에서 왔어요? "

" 한국이요. "

" 아! 평창 올림픽! "


보통 한국이라고 국적을 이야기하면 그 자리에서 대화가 끝나곤 했는데 한국이라는 대답에 반색을 해 주는 주인이 신기하고도 고마웠다. 동계 올림픽을 세 번이나 개최했던 이 인스브루크에서 스포츠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겨울 관련 스포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정작 내가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평창 올림픽에 대해 아는 바가 부족했기에, 그와 대화를 길게 이어가기는 힘들었다.  모처럼 우리나라와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행사에 관심을 가져 준 그에게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못해 아쉽고 또 미안했다.


스키 고글은 렌털이 되지 않는다고 했던 인터넷 정보와는 달리 고글까지 포함해 1인당 100유로 정도에 모든 장비를 빌릴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대화에는 성공하진 못했지만 쇼핑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걱정했던 알프스 스키 여행이 순조롭게 출발하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긴장을 푸는 것도 잠시뿐, 곧이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샵에서 스키장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모두 출발해버린 것이었다. 일반 버스로도 갈 수 있는 스키장을 추천해 달라고 이야기하니 사장은 '쿠타이(KUHTAI) 스키장'이라는 곳을 안내해 줬다. 지도로 얼핏 봐도 이곳 시내에서 꽤나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버스로 한 시간이나 가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스키와 폴대 같은 거추장스러운 장비를 지니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스키부츠를 신은 채,  1시간이나 일반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답답한 상황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장비를 대여해 버린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딱딱한 스키부츠를 신은 상태로 샵을 나섰다. 스키 부츠의 조임 장치를 풀었음에도 발목이 조여왔다. 덕분에 버스 정류소까지 다리를 벌린 상태로 뒤뚱뒤뚱 걸어가야 했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뭐가 재밌는지 그 불편한 부츠를 신고는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장난을 쳤다. 당장의 불편함조차 즐거움으로 만들어 버리는 아이들의 여유와 능력이 새삼 부럽게 느껴졌다. 렌털 샵 주인의 가깝다는 말은 스키부츠를 신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던 모양이었다. 10분을 훌쩍 넘어서야 정류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3월의 날씨였음에도 스키복을 입은 등 전체가 땀으로 흥건해졌다.


잠시 후, 스키장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인스브루크의 호텔에서는 스키 이용자들을 위해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쿠폰을 나눠주고 있었다. 간혹 쿠폰만으로는 이용이 안 되는 버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살짝 불안했다. 확신 없는 표정으로 호텔에서 준 쿠폰을 승차권 대신 보여주었다. 다행히 버스 운전사는 무심하게 통과를 시켜주었다. 중간중간 스키복을 입은 채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멈추는 정류소마다 스키복장을 한 사람들이 계속 올라탔다. 연세가 있었지만 세련된 스키복을 입은 여성 한 분이 버스에 올랐다. 얼굴에 자연스럽게 그려진 주름을 보니 환갑이 훨씬 넘어 보였다. 하지만, 스키 폴대를 익숙한 자세로 지니고 꼿꼿하게 앉아있는 모습은 여느 젊은이 못지않게 기운 차고 당당해 보였다. 어쩌면 그녀는 우리 형제들보다도 훨씬 어릴 때부터 이 알프스 산맥을 누벼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 시간 남짓 걸려 쿠타이 스키장에 도착했다. 함께 내린 사람들의 행렬에 이끌려 특별한 고민 없이 3명분의 리프트 이용권을 구입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이용권 세장을 모두 구입한 것을 바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매표소 바로 앞에 위치한 완만한 경사지에서 어린이와 초심자를 위한 에스컬레이터가 별도로 운행 중인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스키를 처음 타는 혁우는 물론, 몇 번 타 봤던 일우조차 굳이 리프트를 이용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완만한 이곳에서 스키를 타는 편이 훨씬 안전하고 좋은 선택임이 확실했다. 5만 원 가까이 되는 비용을 쓸데없이 지출한 것 같아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생애 최초의 알프스 스키 여행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금세 스키에 익숙해지더니, 오후 무렵에는 처음 스키를 타는 혁우조차도 리프트를 타고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혁우가 이렇게 스키를 빠르게 배울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시 새옹지마 이야기가 떠올랐다. 행운으로 보인다고 모두 행운이 아닌 것처럼 불행으로 보인다고 반드시 불행은 아니었다. 정말 우리들 인생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와 초심자를 위한 에스컬레이터의 모습

갑자기 웬 남성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스키장 안전요원이 공중에 멈춰 선 리프트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람이 타고 있는 리프트 하나가 안전바도 내려지지 않은 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리프트에 앉은 동양 아가씨는 자신의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하고만 있었다. 그녀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상에서 계속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그들의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몰아치는 돌풍에 공중에 매달린 리프트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제야 위험을 느낀 그녀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허둥대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아! 어떡해. 나 어떡하면 좋아...”  

   

그녀의 입에서 귀에 익은 우리말이 흘러나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머리 위에 있는 안전 바를 내리세요!”    

 

나는 황급히 그녀 머리 위에 놓인 안전 바를 가리키며 고함을 쳤다.


"네?"


같은 한국말에 그녀도 잠시 당황했던 것일까?

  

“아! 네....”  

   

내가 계속 다급하게 그녀의 머리 위를 손으로 가리키자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그녀가 머리 위의 안전바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자신의 허벅지 쪽으로 내렸다. 그녀의 안전을 확인한 스키장 직원은 그제야 리프트를 재가동했다. 리프트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큰 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지만, 아쉽게도 형제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스키에 재미를 붙인 형제들은 오로지 스키 타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처럼 자랑스러운 아빠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놓친 나는 뒤통수만 긁적일 뿐이었다.


한산했던 쿠타이 스키장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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