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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녹 Jun 25. 2021

각자가 정하는 코끼리의 모습

영화 '세 번째 살인' 비평


  영화 ‘세 번째 살인’은 살인자 미스미의 재판을 다루는 법정물이다. 주인공 시게모리는 이전에도 살인한 적이 있는 전과자이며 또 한 번 그의 사장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른다. 미스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시게모리는 재판에서의 승리를 위해, 미스미의 사형을 선고 막기 위해 살인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그런데 여느 법정물과는 다르게 이 영화는 진행되면 될수록 사건이 해결되기는커녕 더 모호해지기만 한다. 사건의 가닥이 잡혀가는 듯하면서도, 예상치 못하게 전개되는 주변 상황과 피해자의 딸인 사키에의 고백으로 끊임없이 변수가 생긴다. 게다가 변호를 받는 당사자의 진술마저도 쉽게 믿을 수 없이 번복되어, 결국은 조사하며 쌓아온 추리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도 한다. 



  이를 보다 보면 이 영화의 목적은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리는 것만 같다. 영화에서 언급된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각기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처럼 이 영화에서 말하는 진실도 결국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으며 진실을 보려는 관객의 눈 또한 가려지게 된다.


 영화에는 끝끝내 누가 피해자를 죽였는지에 대한 진실은 나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은 영화를 보고 나면 다들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실제 진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에서는 모두 자신만의 진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키에에게는 미스미가 구원이라는 진실이, 검사에게는 미스미가 살인자라는 진실이, 판사에게는 소송경제라는 진실이. 시게모리에게는 미스미를 이해할 수 있는 진실이 존재할 것이라는 진실이, 미스미 마저도 자신만의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하나의 진실은 없다. 영화 초반에 시게모리는 사건을 조사하며 진실은 원래 보이지 않으며 각자에게 유리한 것을 취사 선택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관객들은 여느 영화와 같이 영화 보는 내내 결백한 진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결국 누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진실을 기다리며 영화를 보면서 누가 잘못했는지를 알고 싶었던 우리의 태도는 어쩌면 진실을 핑계로 남을 성급히 정의하는 폭력적인 행위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온전치 못한 각각의 진실이 남을 마음대로 정의하는 것에서만 끝나지 않고, 사람의 생명과 맞닿아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명이 관련된 중대한 상황에서, 대립하는 주장 중 하나의 진실을 고를 수 없다면 그중 가장 진실한 주장을 고를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할까? 다시 말해 사형을 가름하는 진실이 과연 합리적인가?


  이와 비슷하게 미스미는 사건을 파헤치는 시게모리에게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느냐는 누가 정하는가를 묻는다. 또한, 카나리아의 무덤 위의 십자가를 보고 나서 미스미가 카나리아를 죽이거나 살린 것처럼 피해자를 심판한 것이냐는 시게모리의 질문에 미스미는 누구를 심판하는 것은 오히려 당신들의 방법이라고 답한다. 


  이처럼 우리는 살면서 항상 자신의 기준과 진실로써 누군가를 판단하고 있지만 그의 가장 폭력적 형태는 사형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스미의 살인죄와 사법부의 사형선고는 둘 다 각각의 진실로 인해 벌인 살인인데도 하나는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영화는 국가의 사형제도와 개인의 복수나 심판이 정말 본질적으로 다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살인이라는 제목은 결국 미스미에게 내려진 사형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공명정대한 진실을 외치는 사법계를 향해 너희가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도 결국 살인이라는 비판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장면 중 미스미와 사키에는 피해자를 살인하는 듯한 모습과 함께 볼에 튄 피를 닦는 행동을 한다. 나중에는 시게모리도 무언가에 홀린 듯 볼을 손등으로 닦는 행동을 한다. 이는 사법계도 살인을 저질렀다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재판의 전략을 바꾸는 시게모리의 결정으로 미스미의 사형이 거의 확정되었을 때 변호사인 그가 볼을 닦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엇을 닦아내는 그들의 행위로 살인이라는 진실 또한 닦아 없어진 듯하다. 하지만 시게모리만이 법이라는 정당성아래에서 피가 묻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우리도 일상적으로 타자를 우리의 진실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고 있다. 평소 뉴스나 기사에서 사건의 진상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성범죄 피해자를 “꽃뱀”이라고 칭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저명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우리가 늘 사용하는 언어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라고 한다. 본질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그 일면만을 보고서 전체를 판단하며 언어로 내뱉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 책에서는 인종차별에 대해 “흑인이 백인으로부터 열등한 존재로 취급당하게 되면, 흑인들은 정말로 사회적-상징적 정체성의 차원에서 열등한 존재가 된다.”라고 한다. 이렇듯 타자를 어떠한 진실로 손쉽게 규정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인종차별이라는 갈등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시게모리와 미스미가 면회실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창은 장면에 따라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유리창에 비친 모습으로 서로가 겹쳐져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유리창은 없어지지 않고, 둘은 다시 멀어진다. 우리는 타자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로 유추할 뿐이다. 시게모리처럼 자신의 딸이 흘리는 눈물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 평소에도 허다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치열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자신도 본인과 다른 타자들을 심판하며 일종의 사형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고, 일상적인 폭력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타인을 잘 알고 있다는 오만을 버려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도 이 순간에도 행해지는 사형이라는 제도가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져야 한다. 



  영화는 시게모리가 십자가를 닮은 네 갈래 길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듯이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재판의 승리를 최대의 가치로 생각한 그도 재판이 끝나고 우리처럼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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