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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녹 Jun 25. 2021

우리가 소녀상을 바라볼 때

생각들

  올해는 김학순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처음 일본군 위안부가 겪은 피해 사실이 폭로된 지 30년째 되는 해이다. 30년 동안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알리는 다양한 운동이 있었고, 그에 따른 성취와 좌절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수요일마다 마음을 모으고 있다. 그 기간동안 위안부에 대한 다양한 내러티브도 세상 밖에 나왔다. 실제 할머니들의 증언과 그를 잇는 연구뿐만 아니라 영화, 소설과 같은 대중문화물도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이전의 한국 사회에서는 위안부의 이야기가 금기시되었고 모두가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했었다. 그러나 현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증언과 재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여태 치열한 운동의 성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생존자의 구체적인 증언과 그 재현은 사회에 연대와 책임을 촉구한다. 그리고 이는 피해자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하게 한다. 피해를 드러낸다는 것은 동시에 피헤자의 노력을 통한 상흔의 극복과 치유의 기능을 한다.그렇기에 화자로서의 피해자와 청자로서의 사회를 연결해주는 재현의 문제는 사회 인식과 정의 구현을 위해 다각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위안부의 문화적 재현은 다양한 표상을 겪으며 이루어졌다. 1960년대를 시작으로 위안부는 성애적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단발머리의 소녀가 되기도 했고, 다양한 영화를 통해 운동가로서 할머니가 되기도 했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1982), “고삐”(1988) 등과 같은 소설이 등장하며 위안부는 남성 중심적인 시각으로 소비되어 왔다. 그들이 당한 폭력은 선정적으로 묘사되었으나,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고발하는 것이라는 이유를 가져오며 정당화되었다. 2004년 2월, 배우 이승연이 위안부를 컨셉으로 한 영상집을 만들기로 한 것이 가장 노골적인 예시이다. 여자 연예인들의 누드 화보집이 성행하던 때에, 남성의 성적 판타지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촬영본은 위안부를 상품화하고 그들의 상흔을 모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위 사건을 계기로 위안부 재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중적으로 인식되었다.


  2011년 첫 번째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난 후에는, 지금까지도 소녀 표상은 가장 효과적으로 일본의 전쟁 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소녀상’은 대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시민 사회의 성찰을 촉구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 표상이 되었다. ‘평화의 소녀상’은 그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만, 호주, 샌프란시스코에 건립되기도 하는 등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녀’가 가장 무고한 희생자에 적합한 이미지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소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시민이 챙겨준 목도리를 두르고, 마스크를 낀 소녀상의 모습은 시민들이 소녀를 ‘돌봐 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돌봐줌’의 행위가 정치적인 연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소녀를 가엾게 여기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 틀은 ‘소녀상’이 소녀의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더 확장된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거리의 소녀상이 성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사건으로 연결된다. 소녀상에 신체 접촉을 하고 SNS에 인증하는 일이 각 지역에서 발생해 논란이 커진 것처럼, 우리는 왜 소녀가 강력한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조금 더 성찰해 보아야 한다. 가장 순수한 이미지가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성범죄 사건에 자주 등장하는 '순백의 피해자' 라는 환상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소녀의 이미지는 과거의 피해에만 집중되기가 쉽다. 그러나 위안부 생존자들이 겪는 고통은 현재형이다. 겨우 일제에서 도망쳐 고향에 왔지만, 그 이후에도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 못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우리는 그들이 살아 가는 모든 과정에서 상흔이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가 단순히 도움이 대상이 되는 것, 혹은 개인의 개별적 경험이 무시되고 전형적인 이미지만을 남기는 것 또한 재현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히 ‘소녀상’을 위안부 피해자들을 순수한 소녀로만 국한시켰다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 것이다. 위안부 운동과 페미니즘을 단순히 대치시키는 박유하 식의 비판도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녀상’은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기억의 정치를 위한 재현은 앞으로도 치열하게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양현아. (2006). 증언을 통해 본 한국인 ‘군위안부’들의 포스트식민의 상흔 (Trauma). 한국여성학, 22(3), 133-167.

허윤. (2018). 일본군 ‘위안부’재현과 진정성의 곤경-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 여성과 역사, 29, 13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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