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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덤

by opera


결심한 것 만큼만 실천되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매일 반성의 글을 쓰지 않고, 오늘 행복했노라 좋아했노라 기뻤노라 사랑했노라 감사했노라 지금 행복하노라 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변화하는 사회 풍조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래도 재빨리 적응하고 움직이고 싶지 않은 마음 한구석이 있다. 말고삐 잡아 늦추듯 마음을 추스른다. 조금 천천히 가지 뭐. 추억을 간직하고 그리움을 품고, 가끔씩 미움과 원망도 곁들이면서 아파하며 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다독인다.


하룻밤 사이에 꽃 무덤이 생겼다. 노란 목단 꽃 무덤이다. 필 때도 커다란 얼굴이 보이지 않게 뒤돌아서 피더니, 고개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하룻밤 사이 피를 토하고 죽어버렸다. 누가 만들기도 힘든, 봉긋하게 한자리에 쏟아져 내려앉은 무덤을 만들었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가 쓸어내렸을까? 아니다 어제저녁까지 멀쩡히 있었다. 그저께 억세게 불던 바람에도 괜찮았는데... 그렇다면 어젯밤 아주 늦게 아니면 오늘 새벽 일찍 떨어진 것이다. 하얀 목단꽃이 한 잎 한 잎 떨어져 바람에 날리고 지저분하게 퍼지며 "나 이제 가노라"라고 외치던 것과 달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던, 아이가 한 군데서 피를 쏟고 떨어져 버렸다.


사람도 이렇게 갈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런 삶을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마는 노란 목단은 무엇을 말하면서 사라진 것일까. 어쩌면 "사랑받았으므로 행복하였노라"는 시를 읽어주고 간 것은 아닐까. 위대하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살다 간 세상이다. 지금 있기에 세상에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 지나간 자 이들에게 감사하고, 함께 있는 자들을 사랑하며 앞으로 올 자들에게 고마움을 주어야 된다는 생각을 보인다.



사 올 때부터 기대감을 가졌고, 맺혀있던 꽃봉오리가 활짝 열릴 때를 매일 쳐다보며 기다렸다. 잘못 심어준 잘못을 탓하면서도 기다렸고, 마침내 고개 숙여 핀 꽃을 바라보았고 이웃들의 관심과 사랑도 많이 받았던 아이였다. 제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자책감이 들었었나, 갑자기 쏟아붓고 갔을까, 깔끔하게 꽃잎을 말리고 싶을 정도로 한 군데 쏟아부었다. 얼굴 들고 햇빛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살았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사랑받고 있었다는 것을 노랑 목단도 알고 있었기에 한 잎도 따로 떨어진 적 없이 한꺼번에 떠나는 모습을 보인 걸까. 이제 앞쪽으로 나온 노랑 목단이 남아있다. 우리 집에 와서 생긴 아이다. 편안하게 얼굴 피울 수 있도록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우체국 창문 앞에 서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로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 하나리라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 님의 시 "행복"

보이지 않는 뒤에서 고개 숙여 피었던 노랑 목단

노랑 목단의 흔적들. 한 군데로 모여서 떨어지다

앞에서 보이는 쪽으로 핀 작은 노랑 목단. 역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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