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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Nov 09. 2021

노르딕 누아르(Nordic Noir) 딜레마

넷플릭스 노르딕 누아르 "살인 없는 땅" "트랩트"를 보면서

 


넷플릭스를 구독한 지 이년 넘었지만, 자주 보지 못하다가 요즈음 많이 보게 된다. 이전에 미드 csi를 열심히 시청한 것처럼 수사물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노르딕 수사물을 접하게 되었다. 우선 화질의 느낌이 다른데, 화면의 픽셀 수가 높은 것이 아니라 색감 전체가 다르다. 아마 노르딕 방송물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보라색에서 붉은색으로 이어지는 가시광선의 파장대를 넘어선듯한 독특한 색감은 노르딕 분위기를 나타내는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노르딕 누와르를 얘기하면서 색감을 먼저 논하는 것에 대해, 한 번이라도 노르딕 누와르를 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흰색은 흰색이 아니다. 검은색과 푸른색 위에 펼쳐진 하얀 설원은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함을 품고 있다. 아마도 황량하고 무채색에 가까운 대지에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환경 속의 사람들을 표현하기에 너무 단조로워 어쩌면 색감으로 분위기를 독특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겐 인상 깊게 보이는 첫 이미지다. 설원 속에 감추어져 있는 노르딕 누와르의 청푸른 빛은 눈의 건강을 위해서는 좋지 않지만, 인간 심리의 오만가지 어두운 면을 들춰내는 도구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울 색이기도 하다.


노르딕 국가는 북유럽의 다섯 나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를 말하며 준노르딕 국가로는 그린란드(덴마크령), 올란드 제도(핀란드), 페로제도(덴마크)이다. 노르딕 국가의 국기는 덴마크의 국기인 "다너 블로그"(Dannebrog)의 디자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앙에서 왼쪽으로 치우친 스칸디나비아 십자 무늬가 특징이다. 올란드 제도와 페로제도의 국기 역시 스칸디나비아 십자 무늬를 쓰고 있다(위키백과). 이상하게 노르딕 국가에는 모두 십자가가 들어있다. 척박한 환경에서 경계를 세워 줄 신앙심마저 없었다면 무너지기 쉬웠기 때문이었을까.


"노르딕 누아르"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누아르"라는 장르의 명확한 정의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아르는 독립된 장르라기보다는 느낌이나 분위기로 구분되기 때문에 누아르이기만 한 영화는 있을 수 없다.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의 작품들은 모두 누아르로 불러준다(나무 위키). 노르딕 국가를 배경으로 만든 누와르 장르의 드라마라, " 노르딕 누와르"라는 표현을 쓴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스웨덴의 소설가 "헤닝 만켈"의 소설을 원작으로, 2008년 영국 BBC 방송국에서 제작한 월랜더(Wallander)는 넷플릭스로 우리나라에 방영되기 이전 부타 유럽과 미국, 특히 영국에서 인기를 얻었던 노르딕 누아르의 소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노르딕 누와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살인 없는 땅"과 "트랩트"는 방영되면서 많은 화제를 낳은 작품이기도 하다.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임에도 형사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죽은 자, 피해자의 마인드로 생각하고 문제를 펼쳐나간다.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스산한 얼음왕국의 정경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온갖 추악한 내면을 내리는 눈처럼 천천히 아주 느린 스텝으로 풀어나간다. 여기에 주인공의 어릴 적 트라우마도 드라마 전개에 필수적이다.


내리는 눈은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듯, 방금 지나간 일들도 덮어버린다. 인간은 죄 속에서 산다는 것을 표현이라도 하듯이, 서로가 서로의 내면을 모르기에 덮고 덮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는 일상을, 눈은 표현하고 있다. 드라마의 비극적인 내용과는 상반되게 이성적이며 차분하고 깨끗해 보이기도 한다. 결국에는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이런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인데, 함축된 모든 것들을 덮어버리는 눈처럼 아무 일도 없듯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을 표현한다. 노르딕 드라마에 이상하게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어쩌면 다양한 인간군상의 허무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2016년도 제작된 핀란드의 수사물 "살인 없는 땅"의 형사 "카리 소르요넨Sorjonen" (빌레 비르타넨 1961년 생)은 할리우드풍에 익숙한 우리나라에서 주역을 맡기에는 잘 생기지 않은 외모에다 독특한 성격, 병까지 가지고 있는 수사관으로 나온다. "트랩트"의 "안드레"는 이웃 뚱뚱한 아저씨처럼 평범한 사람이다. 물론 주위의 다른 출연자들 역시 외모로는 보통사람들과 같은, 아니 어쩌면 더 잘생기지 않은 배우들이다.  "살인 없는 땅 "이나 "트랩트"같은 노르딕 누와르에 대한 글은 인터넷상에도 많이 있다. 나 혼자 보고 이해하기도 벅차 하는 시청자로서 그에 대한 소개나 평을 하긴 많이 부족하다. 다만 나름대로 느낀 몇 가지를 적는 것으로 나의 노르딕 드라마에 대한 관전평을 그려본다.


# 드라마의 전개가 느려도 너무 느리다.

   색감으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노르딕 누와르"는 지루할 정도로 느린 전개로 펼쳐진다. 미드 csi는  할리 우드답게 속전속결이다. 박진감, 빠른 전개 속도로 결과애 대한 궁금증이 극에 달하기도 전에 결과를 속시원히 드러내기도 한다. "인과응보"에 익숙한 우리 정서에도 맞게 마치 무지개의 "빨주노초파남보"가 후다닥 지나면서 결말을 선물하는 것 같다. 하지만 노르딕 드라마는 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분명한 선의 연결도 없이 몇 가지라고 결코 표현하지 못할 파장들이 널려져 있다. 한마디로 정답은 없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 자체의 정답을 뭐라 말하기 힘들기에 잠시나마 공감하면서 푸른 물빛에 젖어 보는지도 모르겠다. "저런 공감 안 될 각본으로 어떻게 할까도 싶고 때론 상식을 비켜가는  어리석은 전개가 눈에 보일 정도로 답답하기도 한데, 결과는 진행된다. 그리고 결국 이해도 된다. 돌아가는 방식이 답답하지만, 돌아보니 답답하지 않게 지나간 과정이다.


# 주변 이웃 같은 연기자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이 자연스러움은 연기를 자연스럽게 한다는 의미보다는 그들의 외모에서 원초적인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내 주관인지는 모르겠다. 주연급 연기자들은 하나같이 성형을 하지 않은 자연산(?) 외모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노르딕 자체가 사람이 손댈 수 없는 자연환경이 아닌가. 모든 것을 덮을 수는 있어도 바꿀 수는 없다. 봄이 오면 맨살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기에 모진 겨울도 자신의 일부로 인식하고 살아온 역사와 환경 때문인지 몰라도 사람들도 외모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보인다. 요새야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앵커가 바지 정장을 입지만, 예전엔 상상도 못 했을 일 아니었던가.  tv에 얼굴이 비치는 사람들 남녀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성형하고 변모시키는 젊은 사람? 일색인 우리나라를 보면 아쉬웠던 점이다.  노르딕 누와르의 연기자들의 얼굴은, 주름 하나 건드리지 않은 모습으로 마치 차가운 겨울 하늘을 향해 무수히 뻗쳐있는 삼나무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설원을 누비는 인간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런 배우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에서는 런 배우를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시청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성형한 얼굴인지 분장한 얼굴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트랩트"의 주인공 "안드레이"를 연기한 배우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 배우로 선정되었다는 얘기를 들고 웃었지만 공감했다.


# 상처 받은 일을 풀지 못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가 깔려있다.

    몇십 년 전의 스쳐간 원한도, 아무것도 없었던 하얀 눈밭이 봄에 녹아 덮어준 줄 알았던 눈이 녹으면서 드러나는 흔적들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도드라진다. 새겨진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라마 전반에 녹이고 있다. 어찌 잘못된 일들, 상처 받은 일들만 지워지지 않겠는가 마는 살아온 흔적들은 과거에 묻혀져도 결국은 안고 가야 할 분신이라는 것도 보여 준다. 일상을 잘잘못만을 구분하면서 살 수도 없지만 누구에게라도 특히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서는 안된다.  


# 상처입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 단지 받아들이는 차이만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밖에서 보면 하얀 세상, 모든 것이 깨끗하고 정돈되어 순수한 삶만 존재할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서 온갖 추악한 일도 벌어지고 있다. 인간의 양면성은 정반합의 원리처럼,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늘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다만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기보다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공존해가는 방법을 배울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는 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순응과 치고 나가는 것의 대비를 보여준다.

    만약 노르딕 누아르의 색이 푸른색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는 하얀색, 흰색의 눈으로만 표현되었다면 드라마의 영향은 어땠을까 싶다. 카메라 기술이 좋아져서 색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덕에 흰색은 단색이 아니라 프리즘을 통과한 여러 색을 보여준다. 설원 속에는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스며들어있다. 사람들의 표정까지 자연스럽게 푸르게 녹아들어 있다. 반항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환경이 무감각하고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때로는 옳지 않은 출구로 치고 나가게 한 건지도 모른다는 연민을 깔고 있다.


# 네 잘못이 아니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혹 그에 엮인 이가 "아이"라 해도 드라마에 나오는 어른들이 먼저 하는 말이다. "작든 혹은 큰소리"든 야단맞는 일에 당연하게 익숙해져 살아왔던 우리 귀에 쏙 박히는 말이다. 동양의 사고방식은 어떤 일이 발생할 때 우선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내 탓이요" 정서가 겸손하게 받아들여지는 문화다. 이에 반해 서구에서는 잘잘못을 분명히 하고, 때로 실수에 의한 실수가 있을 때에도 "네 잘못이 아니다"는 말을 분명히 해준다. 이점에서는 오래전에 본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암스가 맷 데이먼에게 말한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에서 잘 보여준다. 영화는 이 대사 하나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음침하도록 스산하고 외롭게 고립된 환경에서 살아질 수밖에 없는 아이들, 돌파구를 찾는 아이들에게,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을 일이 일어났고 이미 그 일들은 현실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일어난 일에 연연하지 않는 수동적인 자세가 환경에 의한 영향으로 굳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세기 동안 그들(어른들, 선조들) 역시 거쳐왔기에 의연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르딕 누아르를 여러 편 보니 솔직히 우울하고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도 들지만, 일 년 내내 파란 하늘 낯설지 않게 살아가는 환경의 고마움이 새삼스럽기도 하다. 푸르른 색감은 더운 여름날 시원함도 줬지만, 붉게 물들어가는 솔직한 가을에는 다가올 흰 눈이 있어서 인지 강렬한 느낌도 덜하다. 어둡고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만 같은 무거운 환경이지만 사람들의 영혼은 날아다니는 눈발처럼, 깃털처럼 가벼운 것을 본다. 욕심까지 얼려버리는 차가운 눈 속의 삶,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설원 속에서 혼자 버텨 낼 사람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르딕 누아르의 주인공이 한 사람이 아닌 이유가 아닐까.




보잘것없는 시골 수사관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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