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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Nov 11. 2021

첫눈 내리는 마당 밭의 배추와 상추 자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희끄무레한 하늘에서 올 첫눈 발이 흩날린다. 아니, 벌써 첫눈이라니... 어제도 그제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바람까지 불어 이 비가 그치면 금세라도 겨울이 닥쳐올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래도 눈까지 날릴 줄은 몰랐다. 첫눈이 올 때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본다.


마당 밭의 상추는 지난 금요일 잘 뜯어먹었는데, 그새 제법 자랐다. 바람도 불고 밤이면 영하로 내려갔는지도 모를 날씨였는데... 상추는 반려식물이지만, 목숨 바쳐 사랑을 보인다. 그렇다 해도 날이 더 추워지면 상추는 분명 얼어버리고 말 것이다. 금요일 수확한 상추는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제법 질기기까지 한, 식감이 좋은 채소였다. 이 계절의 상추는 하우스에서 재배된, 연하고 보들보들한 물 많은 상추와는 본(本籍)이 다르다.

더 아삭거리고, 꼭꼭 씹어야 하고 약간 씁쓸하며 진한 맛이 나는 쌈 채소다. 고기 없이 쌈장으로만 싸 먹어도 맛있는 한 끼 반찬으로 훌륭했다.


눈발이 날리는 바람 속에 상추가 염려되었다. 내일은 더 추워진다는데, 어차피 겨울까지는 아니더라도 있는 동안에라도 편히 자라게 해 주자는 마음이 들어 지지대를 세워 비닐을 씌울까 생각하다, 문득 작년에 작은 나무에 씌웠던 미니 온실이 생각나 상추에 씌워주기로 했다. 상추밭에 씌워놓으니, 생각보다 훌륭했다. 바람에 비닐온실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돌을 많이 고여놓고 보니, 이 정도면  많이 추워지기 전까진 괜찮을 것 같다.


어제는 옆으로 벌어지기만 하는 배추 아이들을 모두 묶어 주었다. 요새 배추는 묶지 않아도 저절로 결구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 배추는 옆으로 퍼질 줄만 알았지, 잘 오므라 들질 않았다. 차라리 묶어보라는 지인의 말대로 비가 보슬거리며 내리는데도 배추를 묶었다. 배추를 묶으면서 만져보니 아이들이 뿌리도 약하다. 벌어진 모양으로는 커 보였는데, 속은 별로 차지 않아 허당이란 생각이 들었다. 난생처음 배추 모종을 심어서 이만큼이라도 푸르르게 잘 자란 것을 보면서 그저 뿌듯하기만 했었는데, 이제 욕심이 생겨 김장배추로까지 잘 커주길 바라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첫눈이 내리고 날은 추워지는데, 차지 않은 배추 속은 언제 채워질 것인가 싶으니, 욕심만 있었지 제대로 돌볼 줄은 몰랐던 초짜 농부의 게으름이 아쉬웠다.


"그래, 이것도 경험이다"

"상추밭의 온실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해 줄 거야"

"배추를 쌌으니, 의외로 속이 잘 찰지도 모른다. 기다려 보자"


기대에 부응하게 남은 몇 주까지 잘 자라준다면 고맙게 김장을 잘할 것이고, 혹시라도 속이 안찬다면 겨울 배춧국도 끓여먹고, 데쳐 냉동실에 넣고 계절 내내 먹으면 된다. 이래도 저래도 지금까지 잘 자라준 것도 충분히 감사하다.


상추도 미니 온실 덕에 몇 주라도 더 자라준다면 고마울 것이다. 누구도 먹기 힘든 귀한 쫄깃하고 싱싱한 상추가 건조한 식탁에 생기를 부어 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마당은 노력할 만한 것을 보여주고 합당한 움직임을 요구한다.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라도 움직임이 이어져야 마당의 땅도 돌려줄 것을 선물한다.


마당에 흩날리던 눈발은 그쳤지만 한치 앞일도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처럼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매일을 개척하며 가야 하는 삶의 등반길에서도 미리 보여주는 친절함을 경험하면 좋겠다 싶은 바람도 든다. 하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찾아 살아가는 맛도 있는 게 "일상" 닐까 싶다.


"배추야 상추야!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날이 추워져도 이겨내고, 네 몫을 감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진짜 순례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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