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배추 속도 차기 전 누렇게 뜬 배춧잎이 나왔습니다

배추 노견병이 들었답니다.

by opera

아기배추가 무럭무럭 자라 청년 배추가 된 지 엊그제 같은데, 배추는 하나씩 속을 채울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 "나란히 나란히" 올라가던 배추들은 두 팔 벌린 푸르름 속에서 "나란히"를 각각 달리하고 있다. 마치 막 사회로 나간 청년들의 펼쳐진 앞길이 제각기 다르듯이, 각자의 몫대로 찾아가듯이 모종으로 심은 배추가 자라 가며 조금씩 크기를 달리 하고 있다. 안쪽에 있는 배추는 유독 작아 보인다. 포기수가 달라서 일수도 있고, 토양질 차이도 있겠고 물을 줄 때 안쪽이라 충분히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뭐 어떠랴, 작아도 튼실하기만 하면 더 맛있는 배추가 될 수도 있다.


뒷마당 텃밭은 큰 밭도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세 군데로 구분이 되고 말았다. 첫 번째 밭은 안쪽, 산수유와 모과나무 살구나무에 접한 제일 큰 밭이다. 물 내려가는 골을 사이에 두고 더 작은 밭이 있다. 중간 밭이다. 여름에 여러 종류의 토마토와 고추 몇 그루와 가지 몇 그루를 심어 잘 따먹었던 곳이다. 테두리 쪽으로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심겨 있다. 우리 집 나무들은 아직 크지 않은 아기 나무들이다. 마지막 밭은 목련나무 앞 조그만 터를 이용해 배추를 심은 곳이다. 배추가 네 포기 심겨 있다. 이웃 밭에 비하면 한 뙈기도 되지 않는 작은 밭이지만, 계절마다 다양한 채소들로 올 한 해 우리 식탁을 채워준 고마운 곳간이다.


속을 채워가는 청년 배추 / 조금씩 차이 나게 크는 배추들

첫 모종을 심었을 때 모습 / 청년 배추로 성숙해진 배추 모습


9월 5일에 심었으니, 이제 40일이 넘었다. 60일 배추라니, 이달 말이나 11월 초에는 알찬 배추가 될 것이다. 인간인지라 욕심이 생긴다. 그저 조그만 모종이었을 때는 늘 하던 철학(?)대로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을 테니 나는 심는다" 였는데,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청년 배추가 되는 것을 보니 기왕이면 속이 꽉 찬 알찬 배추로 잘 자라줘서 김장배추로 쭈욱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본다.


좁은 밭에 촘촘히 심어져서인지 배추는 속도 채우기 전에 밭을 채웠다. 몇 포기나 되는지 정확히 세보기로 했다. 우리 밭의 애칭은 "대중소"다. "소"에는 네 포기가 있다. "중"에는 5개씩 4줄과 좁은 곳에 4개 총 24포기다. "대"는 4 고랑인데 제일 바깥쪽 두 줄은 열 포기씩, 한 줄은 9포기 한 줄은 8포기로 37포기 37+24+4= 총 65포기다. 모두 잘 자라 준다면 우리 집 김장은 물론 지인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양도 되겠다.


잘 자란 배추를 보며 즐거운 꿈도 꿨는데, 다음날 아침에 문제가 생겼다. 밭에 물을 주다 배추 바깥쪽 잎이 누렇게 되고 구멍도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몇 포기가 그런 듯했다. 여기저기 뒤져보니, 올해 배추농사가 잘 안됬다는 얘기가 많다. 우리 배추는 위기를 넘기나 했더니 그렇지 못하나 보다. 배추 재배하는 동네분들이 올해는 비가 잦아서 그런지 "배추 무름병"이 돌아 배추가 내려앉는다고 아예 지금 뽑아 김장을 담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배추를 심어본지가 처음이니 이 증상이 배추 무름병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인터넷에 나와있는 자료를 보면 배추 무름병은 결구(배추 속이 차는 것)가 시작될 때, 수분이 90% 이상인 배추에 물이 너무 많아 배추가 물러지는 것인데, 우리 배추는 물러지진 않았으니 배추 무름병은 아닌 듯싶다.


15일 아침 배추농사 잘 짓는 이웃에게 배추를 보여주니, "배추 무름병"은 아니고 다른 병에 걸린 것 같다며 병든 배춧잎을 한쪽 뜯어 장날 농약사에 가서 보여주면 약을 처방해 주니 뿌려주면 나을 것이라 한다. 아침에 보니 두세 포기가 아니라 옆에 있던 녀석들 피부도 조금씩 변해진 것 같다. 하룻밤 새 애들에게 병이 옮겨진 것인가...


급한 마음에 장날 못 기다리고 오후에 읍내로 나왔다. 배춧잎을 보여주니 "배추 노균병"이라 한다. 어제 인터넷에서 본 생각이 난다. 물 20L에 약 두 숟가락 타서 충분히 섞은 후 많이 뿌려주라고 한다. 지난봄에 사둔 5L 용 분무기가 있으니, 반 숟가락 넣어 주면 되겠다. 만든 것 며칠 두어도 되냐고 물으니, 농약이 산화되므로 24시간 내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두어 번 뿌려 주면 나을 것이라 한다. 다른 분이 진드기 약을 달라고 방문하셨다. 채소들도 생명이 있는 여느 존재들처럼 아프고 낫고 자라고 성숙하고 늙어간다. 아프니 약을 지으러 온 것이다. 약 뿌리지 않고 배추벌레만 잡으면 되리라 했는데, 나도 모르는 새 병들어 치유의 약을 뿌려줘야 한다니, 성숙해진 배추가 되기 위한 거친 과정에 돌입한 것이다. 그래도 고맙다.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우선 병을 낫게 해줘야 한다. 오늘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내일 비가 그치면 약을 줘야겠다.


어제는 비가 내린지라 오늘 오후에 약을 희석해 잘 흔들어 충분히 분사했다. 남은 것은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뿌려 주려고 한다. 무농약으로 키워보겠다고 결심했는데, 배추가 파랗게 잘 자라는 것을 보면서 욕심이 생겨 예방차원에서 약을 한번 줬고, 이제는 정말로 "노견병"이라는 배추병에 걸려 처방 약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려 마음이 씁쓸했다.


식탁에 올라오는 채소들에 약을 주지 않고 키우는 것은 아주 힘들다는 얘기가 사실임을 실감한다. 뒷마당에 살구나무가 한그루 있다. 벌써 몇 년 된 녀석이지만, 초봄을 알리는 환한 얼굴의 살구꽃을 피워주는 일 외엔 한 번도 살구 맛을 보여준 적이 없다. 달리기는 꽤 여러 개 달리지만, 파랄 때 떨어지고, 제법 노랗게 익어가던 녀석들도 결국은 다 떨어졌다. 건너편 집엔 매실나무를 두어 그루 심어놓았는데, 약을 무척 자주 뿌려준다. 그래서 매실을 수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 살구나무엔 농약을 치지 않았었다. 살구나 자두 사과 같은 과실나무에는 농약을 많이 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과를 제대로 수확하기 힘들다고... 그래서 우리 집엔 대추나무와 살구나무, 한 번도 제대로 달린 적 없는 대봉 감나무 한 그루 외엔 꽃나무들만 심었다. 건너편 집에서 약을 자주 쳐 벌레들이 우리 집으로 날아오지는 않나 염려한 적도 있다. 채마밭에 처음 심은 배추들에게 여름 채소에는 한 번도 주지 않았던 약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아기 때부터 청년으로 자라나서 이제 성숙해질 단계까지 애정을 보탠 아이들이다. 속이 꽉 찬 배추를 원해서라기보다 정이 들어 제대로 잘 키우고 싶어 아픈 배추에 약을 뿌려준다. 분무하면서도 혹 약이 과하진 않을까 아래도 낫지 않으면 어쩌나 여러 생각 마음을 무겁게 한다. 땅 발을 받고 자연이 알아서 잘 키워주면 좋으련만, 자연은 살기 위한 여러 존재들이 공존해야 하는지라, 배추를 아프게 하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농부는 곡식을 수확할 때까진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면서도 관찰하고 보살핀다는 말이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큰 뜻은 땅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땅을 키우는 농사는 살아가는 행위의 근본임을 말한다는 옛 성어가 마음에 깊이 박힌다.


이삼 주 후에 다시 약을 줘야 한다. 이미 "나는 100% 자연이에요. 어떤 화학물질도 몸에 닿은 적도, 접한 적도 없어요"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아니 없다. 비교적 청정지역인 우리 동네에도 매일 미세먼지, 대기 오염 상태가 뜬다. 하늘만 그러한가. 나비와 벌만 날아다니지 않고, 이름도 모르는 본 적도 없는 벌레들도 있다. 지구가 병들어 가고 있으니, 몸인 땅이 온전할 수 없다. 배추는 그래서 병이 든 것이다. 예상치도 못했던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전에는 겪어본 적 없는 이 년 가까이 침체된 일상에서도 자기 색을 잃지 않고 푸르게 올라오던 배추를 보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는데... 고마운 청년 배추가 잘 자란 김장배추가 될 때까지, 초짜 농부도 안 되는 나는 더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