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기온이 30도를 넘는다기에 모처럼 아침 산책을 나섰다.언제나 그렇듯 고집 센 샐리는 제 가고 싶은 대로 가려하고, 소심한 보리는 차 소리만 나도 얼음 땡이다. 고집 센 샐리지만 푸들이라 영리해 '안돼' '그만' 하면 싫어도 순종하고 따라온다. 푸들은 털이 잘 안 빠지고 (아니 거의 빠지지 않는다. 푸들을 키워보신 분은 알 것이다.) 성격이 온순해 가정에서 키우기를 선호하는 견종이다. 하지만 의외로 고집이 세다. 샐리가 나이가 많아 고집이 더 세진 면도 있지만, 아기 때도 산에 데려갈 땐 조금 걷다가 안 가겠다고 퍼져 앉기도 한 전력이 있다. 오히려 나이 든 지금은 더 걷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편이니 그래도 다행이다.
나이 들수록 사람도 반려동물도 자기주장만 강해 지나 보다. 살아온 전력이 있어 그렇다고 뽐내는 것일까?
아이들은 마당이나 산책길에 진드기만 없다면 몇 번이고 데려 나오고 싶을 정도로 산책을 좋아한다. 아이들 산책은 식구 중에서 걷는 것을 제일 좋아하니 당연히 내 몫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요즘처럼 그림일기 매일 쓰는 것도 즐겁지만 강아지들과 산책하며 멍하게 걸으며 힐링하는 것은 참 좋다.
산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나오긴 힘들어도 나오면 이백프로 이상 수확을 얻는 생산적인 일, 즐거움이다.
복잡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이렇게 사는 것도 작은 행복이다. 마당을 가꾸기 시작하고 정원 그림일기를 쓰다 보니 글 쓰랴 스케치하랴 때로 약간의 스트레스도 받게 된다. 하지만 뭔가에 도전하는 길은 직접 해봐야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며 또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일인가를 경험할 수가 있다. 그래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은 가급적 다 체험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나 요즘처럼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성행하는 때는 좋은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도 즐거움과 스트레스해소에 도움도 된다.
이 좋은 경치에 "범죄의 재구성" 후기라니...
아름다운 경치 속에 빠져 생각 없이 걷는 지금, 얼마 전에 시청을 끝낸 미드 "범죄의 재구성"이 떠오르다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풍광과는 전혀 상관없는 범죄, 수사, 재판드라마인데...
"How to get away with murder?", "범죄의 재구성"으로 번역했지만, '살인(죄)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하겟머"라고 부르는 애청자들도 있다). 드라마를 보면 살인이 일어났어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형법수업을 가르치는 애널리스 키딩교수와 제자들, 주변인물들과 얽혀가는 사건이야기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여섯 개의 시즌으로 종결된 미드로 주인공은 비올라 데이비스(애널리스 키딩역), 흑인 역사상 최초로 에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라 한다. 드라마에 대한 줄거리나 전체적인 알림장 같은 내용을 쓸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 상세한 정보를 제공할 능력도 없고... 다만 애널리스 키딩이라는 주인공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여배우의 이름은 알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고, 넷플릭스를 통해 전편을 볼 수 있었다. 수사미드를 즐겨 보는 편이라 예전부터 보려고 했지만, 너무 막장처럼 이어진다는 소리도 있고 미루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시청하게 되면서 나름 재밌게 봤다. 드라마는 내용도 전개도 개인에 따라 호불호가 있기에 전체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정말 어이없게 질질 끌어 간다는 느낌과 막장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군데군데 공감 가고 마음을 두드리는 장면도 적지 않았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청해 보고 싶은 몇 편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떤 일이 발생해도 결국은 오뚝이처럼 헤쳐 나가는 애널리스의 에너지와 버팀이 인상적이었다.
한 번쯤은 기억하고픈 대사들
마지막 편, 애널리스 키딩의 장례식장에서 그녀의 친구가 애널리스를 생각하며 한 말이 그녀를 잘 표현해 주었다.
"신념에 충실한 여성,
인생에서 좋은 일은 나쁜 일이나 그 어떤 일 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
애널리스 키딩! 그녀가 가르쳐준 추천가지 중 하나는 지옥 같은 지금도 나중에는 선물이라는 것이 것입니다"
"이 일은 당신을 위해서 해야 해요!
실패하면 실패하는 거죠. 다른 사람들 생각하지 마세요.
항상 부족하다는 말만 듣고 자란 멤피스를 탈출한 어린 소녀를 위해서요!
대법원 심 재판을 앞두고 다 큰 여자가 도움을 청하고 다 컸는데 겁을 먹어서 그래요.
내가 대신 무서워해 줄게요. 애널리스! 이 사건이 당신을 선택했어요.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서 법정으로 들어가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요.
이 병에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은 이미 당신 안에 들어있어요. 난 그걸 알지만 당신을 설득할 자신이 없네요. 그러니까 마시고 싶으면 마셔요"
동료 변호사는 프리미엄 보드카를 보여준다.
"오케이! 그래요! 일어날게요. 그래요 좋아요 준비됐어요. lets go!"
재판을 앞두고 알코올중독자인 애널리스가 괴로워하다 다시 술에 손을 대려 하자, 올리비아 포프 (미드 스캔들의 여 주인공) 변호사가 그녀에게 하는 말이다.
애널리스는 마지막 재판의 변론에서, "살고 싶었고 지켜주고 싶었고 누군가를 위한 삶이 계속 얽히고 설쳐서 자신으로 인한 결과가 악이 된 것처럼 되었다"라고 솔직히 고백한다. 어떤 면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가운데 자신이 있었기에 평생을 스스로를 학대하며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애널리스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그 순간 평생 함께 했던 보니와 프랭크도 잃고 만다. 질긴 인연으로 끝까지 애널리스에게 충실했던 프랭크가 애널리스가 잡지 못한 적을 저격하는 과정에서 둘은 목숨을 잃고 만다.
애널리스는 결국 혼자가 되고 말았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 장례식 장면을 보여줌으로 드라마지만 그녀가 어떻게 남은 삶을 이어갔는지도 말하고 있다. 그녀의 남은 삶이 회한과 고통으로 점철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살아서 나아감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과거에 매인 사람들을 용서하며 삶을 관조하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버텨 온 인생"
거기에 왜?라는 질문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 압도감도 있었다.
드라마도 어떻게든 감동과 공감이 있어야 시청자를 이끌 수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래 저게 바로 내 일이야' 감정이입이 되고 긍정이든 부정이든 마음의 움직임이 유추되어야 드라마로도 성공하는 것이다.
시청하신 분들은 알겠지만, 말도 안 되는 환경 속에서도 애널리스가 한 행동은 끝까지 참고 버틴 것이었다. 물론 주변의 지인들과 제자들을 지키기 위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막장? 사건들로 이어지지만, 시즌 6까지 계속되니 시청자들의 마음도 얻어냈다 할 수 있다. 그녀가 끝까지 버티고 늙어 자연사하는 장면까지 배출해 낸다. 작가가 이 드라마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는지를 논할 필요는 없다. 몰입해서 들을 수 있는 부분과 잠시라도 마음문을 두드리며 갈 수 있는 작은 공감과 여유라도 얻었으면 족하다. 지금의 나한테도 좋은 드라마였다. 나중에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 다시 또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중요한 점은 스스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며 인생에 몰입하고 당당하게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대사 중에 화가 많이 난다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준 것이라는 얘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가끔 지난 일을 생각하면 억울해 화가 날 때도 있다. 하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상냥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먼저 스스로를 용서하고 과거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게 된다.
강아지들과 연두색 신록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파란 하늘, 하늘거리는 나뭇잎사이로 콧등을 간지럽히는 봄바람이 싫지 않은 산책길에서 만난 "범죄의 재구성"도 '용기 있는 사람은 주어진 현재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결국은 전진하는 사람이다'란 공감으로 신록과 하나 되며 마음을 북돋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