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잡아도 놓아도 제 갈길로 흐르는 법,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계절이지만 하룻 밤새 차가워진 아침 공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제 역할을 해내는 자연의 인사를 건네는 쌀쌀한 아침이다.
마당 구석구석을 채웠던 초록 물결은 점차 누런 잎으로 가을이 찾아옴을 알려주고 붉게 타다 떨어지기 시작한 홍단풍옆의 호젓한 아기 청단풍은 얼굴을 완전히 붉히진 않았다.
여름 내내 무겁게 고개 숙이며 아이를 키워가던 모란은 말라가는 몸속에서 단단하고 까맣고 둥근 아이들을 내어 보내기 시작한다. 해산의 고통을 넘어 제 몸을 바스라뜨리며 떨어지는 모란의 아이들을 두 손으로 소중히 받아내며... 고마운 마음을 보내본다.
모질었던 겨울 추위에도 죽은 듯 살아내고 꽃샘추위가 매섭던 이른 봄, 얼어있던 하얀 대지를 뚫고 뾰족이 올라오던 순이었다.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던 때가 언제였을지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던 너의 잎으로 봄 마당은 분주하기만 했다.
농익어가던 어느 봄날, 보름달보다 크고 햇살보다 환하고 커다란 웃음으로 보여준 너의 얼굴은 기다리던 내게 기쁨을 준 것은 물론 온 마당을 설레게 했었다.
모란이여!
너는 충분히 수고했다.
오월의 여왕 하얀 모란! 누가 뭐래도 우리 마당의 여왕은 너였다.
비록 열흘 남짓했지만, 눈부시게 화려했던 너의 자태는 짧은 기간에도 순백한 화려함으로 온 마당을 물들게 했고 부지런한 벌들에게조차 넉넉한 꿀을 제공했다
점점 뜨거워지던 바람은 새털차럼 너의 잎을 널려 너의 분신은 마당곳곳에서 내년의 거름으로 바쳐주었다.
떠나간 꽃잎들 속에 감춰졌던 꽃대에선 너의 결실이 자라기 시작했고 유난히도 뜨거웠던 올여름햇살아래서 땀띠도 상관없다는 듯 으스러지도록 온 가슴으로 껴앉고 키워왔다.
이제 까맣게 타들어간 가슴처럼 토실한 너의 흔적은 내년을, 또 내년을 위한 거름이 될 것이다.
알알이 하나하나씩 털어 여러 집으로 보내기도 했지만, 다 거둬들이지 못한 아이들이 언제나 더 많았다.
주변에 떨어진 씨앗들은 따뜻하게 덮어주는 손길도 받지 못했지만, 모진 겨울 하얀 이불 조각으로 견디고 봄이 오면 경주하듯 여기저기서 올라왔다.
네가 그리도 모진 겨울까지 견뎌낸 것은 동면의 시간에서도 쉬지 않고 땅속깊이 여린 뿌리를 내렸기 때문임을 안다. 얼어붙은 대지에도 너는 굴하지 않고 딱딱한 껍질을 뚫고 생존의 뿌리를 내렸기에 여린 몸으로도 바깥세상의 풍파 따윈 담담하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어찌 보이는 떡잎하나로 가늠키나 했을까.
누가 너를 부귀의 상징이라 했던가!
화려한 꽃송이와 풍성한 자태는 여왕의 위엄으로도 이미 넘치건만 올해도 소중한 씨앗을 남겨주는 너의 모습은 자식을 위해 매 순간 가슴 졸이며 기도하는, 결국은 자신조차 내주고 마는 어미로 살아 있음이 먼저임을 보여준다. 나는 자연의 은혜를 덧입어 감히 말한다.
모란이여!
너는 충분히 수고했다!
p.s.
모란처럼 충분치는 않겠지만, 열심히 지내온 봄 여름을 추억하며 올해 첫 모란을 만났던 4월 19일의 정원일기도 함께 올립니다. 당분간은 도시와 시골 속의 자연 정원글을 올릴 것 같습니다. 자연은 우리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원하기만 한다면 곁에 있어주는 고마운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