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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ra Nov 26. 2023

낮에는 강아지, 밤에는 강냥이 돌보미


가끔씩 거친 바람에 힘들기는 해도 본격적인 강추위가 찾아들지 않은 마당은 썬룸에서 휴식하듯 조용하다.

누렇게 말라버린 꽃의 잔재들과 가지를 품고 안으로 여물게 다져가는 나무들은 잠복소를 남기긴 했지만 모진 겨울, 준비라도 하듯 흙속으로 무게를 내리고 있다. 


식구들이 나간 후면 종일 햇빛 비치는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며 졸다가도, 지나가는 바람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짖어대는 본성을 가진 강아지들을 모른 채 하긴 어렵다. 따뜻한 오후에 샐리와 보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치와와 승리는 오른쪽 뒷다리가 좋지 않아 안고 다녔지만 요즘은 두고 나올 때가 많다.

동네를 두어 바퀴 돌기도 하고 뒷산을 내려와 강가 데크길 걷기도 한다. 동네 산책을 할 때면 머리가 제일 좋다는 푸들답게, 샐리는 온 동네 마실을 다녀야 속이 풀리는 듯 한 번이라도 들른 집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디.  이웃 마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녀석을 옮긴다. 차라리 데크길 산책이 낫다 싶다. 그 사실을 하는지 언젠가부터 샐리는 동네산책을 더 고집하는 편이다.


소심한 보리는 어디로 산책해도 자기 의견이 없다.

그저 나오면 냄새 맡고 바깥기운을 느끼면서 숲에서 마킹하고 주어진 현재를 즐기는 편이다. 강이지 MBTI를 해보면 보리는 백퍼 내향형일 것이다. 그래도 제 실속은 다 차리는 편이니 때론 너무 내대는 샐리보다 쉽게 얻는 것도 많다. 천성이 다른 두 아이 들을 각자의 취향에 맞춰 짧은 산책시간이라도 즐기게 하는 것은 적잖은 신경을 요한다.


즐겁게 산책한 후 마당에 풀어놓으면 구석구석 다니며 관찰을 한다. 요즘은 삼색이가 거주하고 있으니 조심하는 편인데 강아지들이 집안에서 나올 때는 짖고 요란을 떨기에 보통 삼색이는 동네로 마실 가고 자리를 비운 후다. 실내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는 강아지들은 반려견을 넘어 반려가족이다. 그러니 일일이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열 살을 훌쩍 넘은 노견들이다 보니  사소한 불편거리도 해가 될 수 있어 안전에 신경 쓰는 것은 필수다.


집안엔 노견들이 있지만, 마당에는 아직 어린 생명들이 여기저기 뒤집고 다닌다. 작년 겨울, 아기로 입성했던 삼색이와 가끔 오는 깜냥이다. 깜냥이와 콧선생, 삼색이 삼 남매가 제 어미와 함께 마당 한편 미니온실에서 겨울을 났다. 봄에 깜냥이가 애교를 부리면서 집냥이 역할을 했는데 수컷인 깜냥이와 콧털이는 자유본성이 강한지 집을 나갔고 초여름부터는 삼색이가 상주를 했는데 어느 날 새끼들을 네 마리나 데리고 왔다. 그중 아기 노랑이와 가을까지 잘 지냈다가 어느 날부터 노랑이는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고 삼색이만 있었다. 집을 몇 달 비워 노랑이와 삼색이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노랑이는 오지 않고 삼색이만 들락거리면서도 집을 지키고 있었다.


고마움과 반가움에 몇 주 동안 특식을 먹였더니 얼굴이 반질거리고 털도 복슬거리면서 살찐 집냥이가 되어버렸다. 마르고 초췌한 몰골의 삼색이는 사라지고 당당하고 뻔뻔한 삼색이로 돌아왔다. 요새는 집냥이가 다되어 밥을 줄 때면 바짓가랑이를 돌며 늘어지고 골골송을 부르면서 '그동안 어디 갔다 왔냐'라고 투정이라도 하듯 친근하게 군다. 삼색이가 아기 때는 제일 까칠했는데, 새끼들을 데리고 들어오면서부터는 양순해졌다. 아마도 지 새끼들도 잘 부탁한다는 마음에서였으리라. 요새는 마당에 나갈 때마다 쫓아다니며 애교를 더 부리니 예뻐하지 않을 수없다


새로 만들어준 온실 안에 밥그릇과 물그릇을 넣어주면 알아서 집안으로 들어가 맛있게 식사를 한다. 식구들은 삼색이 이름이 촌스럽다고 진이라는 예명까지 지어줬다. 고양이가 자기 이름 두 가지를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지는 알 수 없지만, 가족도 알아보는 것을 보면 나쁘지도 않은 듯하다. 아침에 나가보면 깜냥이도 와서 자는 것 같다. 현관 앞 보관함 위에서 깜냥이가 날래게 내려와 인사한다. 상주할 때 하던 습성이다. 오늘도 안전하게 잘 놀길 바라며 깜냥이와 삼색이 밥을 챙긴다.


저녁에는 마당 데크를 산책하는데 삼색이는 집안에 있다가도 후다닥 나와서는 함께 걷는다. 이제는 강냥이가 돼 버린 삼색이는 운동 중에도 쫓아다닌다. 뛰기도 하고 마당 한가운데서 벌러덩 드러눕다가, 앉아 걷는 것을 보기도 한다. '올라오' 신호를 보내면 와서는 다시 후다닥 뛰어가선 어디론가 숨었다가 깜짝 나타나기도 한다. 제 딴에는 함께 걷기라도 한다는 듯, 놀아달라기라도 하는 것 같다.


강아지처럼 옆에서 걷지 않는 것도 고양이의 특성이다. 제 가고 싶은 데로 갔다 왔다, 뛰다 쉬다,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고양이다. 하지만 행동이 다르다고 교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나 고양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성정대로 함께 하고 싶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몇 달의 이별을 겪은 삼색이로서'기다리면 반드시 온다'는 몸으로 깨달았기에 더 절절하지 않았을까...


들락거리며 만났다 이별했던 길냥이들을 나름 돌보면서 어느 정도 그들의 삶(아니 결국 모든 생명들삶일지도 모를...)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게 된다. 귀엽고 사랑스럽던 냥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혹 무슨 일이나 당한 건 아닌지 염려도 했고 어느 날 다시 불쑥 나타나면 반갑기도 했다. 특히 집을 오래 비울 때면 어디서 밥이나 제대로 얻어먹고 다닐지 걱정도 많이 했다. 브런치 글벗님 중 한 분은 냥이들은 잘 있을 것이라고 걱정 말라는 위로도 주셨다.

이웃들이 가끔 집에 들를 때면 삼색이가 도망가는 모습도 봤다고도 했다. 나름 제 집이고 가족을 기다린다는 인상도 준 것이다.

오는 것도 머무는 것도, 혹 떠나는 것도 계절의 변천처럼 자유롭다는 것을 길냥이들을 돌보면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리 생각하면 모질게 아쉬울 것도 서운 할 것도 없는 것이 삶이기도 한데... 알고 있었어도 실천하기 힘들었던 사소한 감정의 고리들을 하나둘씩 내려놓고 비우고 가는 것도 자연 속에서 함께하는 생명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초목들이 죽은 듯 겨울잠으로 견디는 혹한에서는 움직이는 생명들에게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게 마당에서 사는 삶이다. 다가올 봄이면 다양한 초목들이 한 몸처럼 어울리며 아름답고 조화로운 정경을 이뤄갈 것이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움직이는 생명들은 아름다운 마당을 더 풍요롭게 빛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강아지와 더불어 산책하고 밤이면 강냥이 돌보미가 돼 버린 요즘, 그동안 충분히 즐기지 못했던 여유로움을 찾아가고 있다.

개의 심정이 돼 보기도 하고 성정자체가 다르다는 고양이의 마음도 헤아려본다. 짧게라도 개와 고양이와 함께하는 생활이 싫지 않다.  대지 안의 모든 생명들은 결국은 함께 가야 할, 겸손해야 할 주역들이고 이미  역시 마당의 당당한 일원이기에...

그리고 어쩌면 아직도 뜨거운 아웃사이더의 피가 때때로 흐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햇살 가득한 휴일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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