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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현기 Oct 09. 2020

네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출근길을 나서려고 현관문을 밀고 나온다. 뒤에 남은 것은 밤새 갇혀 있던 텁텁한 실내공기, 깜박이는 LED벽시계의 희미한 불빛, 창문 너머 푸르게 일어나는 새벽, 이들이 나를 배웅한다.


  오래전 경기도의 한 사찰을 찾은 적이 있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설치해서 귀하게 모시는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거려 어느 분을 얘기하였는지는 몰라도 일명 유명한 대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 놓았었다.
먼 산길을 가다 우연히 주워 든 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꽂아두었더니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지팡이에서 새싹이 돋아 났다는 얘기다. 지리산 어느 절 앞의 푸조나무도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이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을 전한다.
상식적으로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얘기이다. 하지만 내가 지나는 길에 들고 온 지팡이를 땅에 쿡 꽂아 두었더니 뿌리가 내리고 새싹이 돋았다고 이 나무를 "채현기 나무"라 부르지는 않는다.
즉, 유명세를 얻고 있는 분의 이야기를 세상에선 우화나 전설로 전한다.

  어릴 적 구슬치기를 하면 동네의 구슬이란 것을 모조리 땄을 정도로 재주가 유달랐고 그 구슬을 또래 친구에게 되팔아 자신의 용돈을 했다는 사람이 있다. 지금 얘기하면 다들 "고놈! 무척 개구쟁이였구나." "키도 작은놈이 꾀나 실했어" 정도의 지나는 얘
기로 끝난다.
만약, 정주영이나 빌 게이츠, 이병철의 얘기였다면 달랐을 거다.
"역시 난 사람은 달라. 어릴 적부터 경제 감각이 있었군"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역시 남달라"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거나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분야를 인정받는 사람의 지난 얘기는 위대한 얘기가 된다.

  옆사람마저도 내가 도와주지 못할 일이라면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 괜히 참견하면 오지랖 떤다거나 괜한 핀잔만 돌아온다. 이러한 인간관계가 어느 순간 사회적 현상으로 굳어져 버렸다. 요즘의 학교생활을 들어 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사제지간의 관계는 진작에 무너져 버리고 학생과 직업인으로서 "선생"-님자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이 공존한다고 한다. 이런 인간관계로 성장한 요즘 세대에게 인간애적 배려심, 양보와 관심을 요구하는 것이 조금은 낯 선일은 아닐까?
교육계에 대한 지나친 왜곡이라 비판의 날을 세울 수도 있다. 일부의 일을 전체인양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일부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앞서 말한 개인의 낮아진 존재감과 사회적 관계에서도 서로의 존재감마저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존재에 대한 정체성 문제에 대해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나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첫째 소시민으로서의 나를 소중히 여기자. 스스로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둘째로 서로 칭찬하자. 칭찬은 수없이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키 워드이다. 칭찬을 통해 나를 인정받고 상대를 인정하고 서로 간의 관심의 마음을 일으키고 나아가서 인간적 배려심도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소중한 얘기를 공유하자. 제일 먼저 가족끼리 서로의 추억들을 공유하는 연습을 하면 좋겠다.

  나아가서 친구, 지인, 동료, 사회에서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열린 마음을 가진다면 이제는 무관심한 관계가 아닌 좋은 관심을 가져주는 우리가 되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누구누구의 나무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의미 있는 물건이 되기도 한다. 작은 물건 하나에 이름과 의미를 담았을 뿐인데 그 효과는 기대를 초월하는 엄청난 일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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