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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민혜 Mar 27. 2021

살고싶은 자의 주문, '미나리'

원더풀 미나리, 원더풀 미나리


어린 손자를 품 안에 안고 나즈막히 읊조리던 할머니의 대사

원더풀 미나리, 원더풀 미나리


내게 그 것은 마치 하나의 주문처럼 들렸다.


"나는 죽고싶지 않아요"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 데이빗의 소망, 그것은 '살고싶다'는 것이었다.

그런 손자를 보듬고 할머니는 말했다. 원더풀 미나리.




많은 사람들이 '미나리'라는 영화를 보고 '가족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살아낸다는 것', '삶'이라고 불리우는 것의 간절함을 보았다. 


한국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그들은 '서로를 구해주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살기 위해 찾은 타국 땅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그 곳에서 마주한 것은 희망이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빚과 죽음을 두려워하며 매일 밤 천국에 대한 기도를 해야만 하는 어린 아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수컷'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자마자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병아리의 성별을 감별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병아리라는 작고 약한 생명체의 '생과 사'를 분류하는 일이 부부의 직업인 것이다. 


가장의 '꿈'으로 포장된 아버지의 농장을 향한 열망은 가족의 희생을 담보로 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 너른 농장을 두고도 죽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껏 뛰지도 못 하는 어린 아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삶에 찌든 채 서로를 원망하기 바쁜 부모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뿐이다.      



그러던 가족에게 어느날 외할머니가 찾아온다.


쿠키도 구울 줄 모르고, 남자 속옷을 입고, 욕도 잘 하는,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그들에게 가져온 것은 고춧가루와 멸치 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그들에게 가져온 것은 '삶의 희망'이었다. 


매일 밤 천국에 대한 기도를 하며 잠들어야 했고, 마음껏 뛰지도 못 했던 어린 손자는 할머니 품에 안겨 천국에 대한 소망 대신 '죽고싶지 않다'는 삶의 의지를 고백했고, '원더풀 미나리'를 주문처럼 외던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잠든 후 기적처럼 아이의 심장병은 완화가 된다. 그러나 늘 가족의 걱정거리였던 아들의 심장병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는 부모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잘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그들에게 그 곳의 '삶'은 더 이상 서로를 구해주는 것이 아닌 서로를 원망하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가장의 전부였던, 제 삶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농장 창고가 화재로 인해 전소되어 버리고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영화 내내 위태로워 보이던 가족에게 이제는 정말 '삶에 대한 의지'마저도 사라진 것이 아닐까, 관객으로서 나는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외할머니의 시선. 어느 순간 나는 그 할머니의 시선으로, 살기 위해 그 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군분투 해 온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돌보는 이 없어도 심어 놓으면 그저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 약으로도 쓸 수 있고, 요리에 넣어 먹을 수도 있고 쓰임새도 많은 미나리, 가족에게는 이제 '미나리'가 남았다.



살고싶지만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 이들에게,

꿈을 향해 힘껏 달렸지만 절망 밖에는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 이들에게,

살고자 하는 꿈이 마치 욕심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간절히 살아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영화는 말한다.



원더풀 미나리



그대들이여, 멈추지 말고 나아가길. 그 푸르른 생명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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