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라라 Oct 06. 2020

욕심 많은 나에게 내려놓기는 너무 어려워

임산부지만 직장인입니다

부모님께는 이야기했으니 이제 회사에 알려야 했다. 회사 내 임산부 복지는 잘 되어 있는 편이었고, 마침 운 좋게도 같은 부서에 임산부가 3명이나 더 있어 심적 부담도 덜했다. 임신 확인증을 받았으니 당장 신청해도 상관없었지만, 1주 더 기다려 아이 심장소리를 듣기로 했다. 초기 유산으로 불편한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1주 뒤 동네 병원에서 심장 소리를 듣고,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며 12주 전 사용할 수 있는 단축근무도 신청했다. 일순 굳는 파트장의 눈빛과 애써 축하하는 듯한 부서장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영원히 숨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12주 전 단축근무는 선택사항이긴 했으나 동시에 법적으로 보장된 부분이기도 했다. 당연한 권리를 요청하며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임산부라는 이유로 전력에서 제외되는 것도 싫었다. 아직 출산 휴가를 들어가려면 7개월이 넘는 기간이 남아 있었고, 낳고 난 후에도 당연히 복직할 생각이었다. 남은 기간 내내 물 경력을 쌓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임산부 치고' 열심히 일한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칭찬으로 들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열심히 한다고 했음에도 단축근무 기간은 미안하고 고마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업무 특성상 내 업무를 다른 사람이 처리하기 어려워 그런 부담은 주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공통 업무를 나눠하기는 어려웠다. 야근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어 불참할 수밖에 없었고, 퇴근이 남들보다 빠르다 보니 오후에 갑자기 일이 터지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일이 넘어갔다.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하며 업무에 지장이 없게 했음에도, 1인분의 업무를 못한다는 기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임신 전과 같은 취급을 바라는 건지 아니면 임산부로서 배려를 받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일하는 나와 임신한 나 중에서 무엇을 더 중요시해야 하는지 정하기가 어려웠다. 일 욕심이 많은 편이라 임산부라는 이유로 예비 병력 취급을 받는다는 게 억울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무리하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방황하는 나에게 위로가 되어 준 건 워킹맘 에세이였다. 임신한 지금도 갈피를 못 잡겠는데, 애가 태어나면 어쩌냐는 불안감에 구매한 책이었다. 그 책의 워킹맘은 직장일과 육아를 다 해내기 위해서는 결국 두 개 다 내려놓아야 했다는 고백을 담담히 적어냈다.


 일과 가정을 모두 잡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항복하고 한쪽을 포기한 선배 워킹맘들을 보고 자란 우리는 일과 가정을 모두 잡으려면 둘 다 조금씩 내려놔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슈퍼맘' 안에는 엄마와 직장인만 있지만 '리얼맘' 안에는 엄마와 직장인, 그리고 그 두 상황에 놓인 여성인 내가 있습니다.

- <나는 워킹맘입니다>, 김아연 지음


아, 그렇다. 내 몸은 하나였고, 온전히 하나만 선택한 사람보다 더 잘하기 어려운 게 당연한 거였다. 임신은 명목상 질병만 아닐 뿐, 낮은 면역력과 널뛰는 호르몬, 무거운 몸을 10개월 가까이 견뎌야 하는 기간이었다. 억울하지만, 내 맘대로 살아온 인생은 이제 내 맘 같지 않을 거라는 걸 지금부터 인정하기로 했다. 둘 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 둘 다 내려놓기로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직장과 육아의 아슬아슬한 줄다기리 속에서 더 욕심내기 어려운 순간들도 오겠지만, 그럴 때마다 다른 하나가 위안이 되줄 것이다. 아이와 커리어를 함께 키우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고 뿌듯하기도 할 것이다. 버티기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지금의 다짐을 떠올리기를 바라며, 오늘 이 글을 남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산과 낙태, 그 사이 어딘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