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가지 않은 건 싫어서가 아니었어요. 입고 나갈 옷이 없었어요." 손광성의 수필 <문간방 사람>에 나오는 글이다.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비밀스런 대사인데 문간방에 사는 사람의 일화 중 하나로 든 사례이다. 옷 때문에 만나질 못하다니 쉽게 이해가 안 되었다. 젊은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고향에서는 진학이든 취업이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도시로 떠났다. 대개 서울로 가는 기차에, 그다음은 대구행 버스에 몸을 싣고 고향을 떠났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방학이 되면 대구에 들러곤 했다. 동성로 한일극장이나 대백 앞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인근 학사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거나하게 취하면 나이트클럽에 갔다. 그때 유명한 클럽이 덕산, 스카이, 한국관이었다.
A는 대구에 가면 꼭 만났다. A는 숫기가 없던 내가 고등학교 때 편하게 말을 주고받던 몇 안 되는 여학생이었다. 3년 내내 1번이었을 만큼 키가 작았는데 깜찍한 외모와 달리 성격이 털털했다. 대백 앞에서 그 애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도 나타나질 않았다. 그땐 휴대폰도 없었고 삐삐도 없었다. 그 애의 자취방에는 전화도 없었다. 며칠 걸리는 편지 외에는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겨울방학 때 그 애를 만났다. 왜 안 나왔냐고 따지는 나에게 그 애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파마를 했는데 맘에 안 들어 나갈 수가 없었어"
그 애의 뺨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