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심리학 #19

"조선의 밤"

by 깨닫는마음씨




잠시 후면 불이 꺼질 것이고 도마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삐뚤삐뚤 못난 것이 있고, 성큼성큼 썰리는 것이 있다.


삐뚤삐뚤 못났다고 성큼성큼 썰리는 중일 것이다.


삐뚤삐뚤 못났으면 이렇게 성큼성큼 썰리게 된다고 알리던 중이었을 것이다.


늦은 밤 산중에 도마소리만 깊어간다.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한 것 같은 아이의 죄책감과 두려움도 깊어진다.


나는 조선의 이러한 풍경을 눈앞에서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안에 담긴 심리적 주제를 절묘하게 묘사한 실존주의 심리학자 롤로 메이의 얘기를 기억한다.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더는 성립되지 않는다. 개인을 죽이고자 하는 거세자는 어머니로 나타난다. 어머니의 극성과 지배적인 관심 속에서 개인은 무력감을 갖게 되며, 이를 보상하기 위해 병적인 나르시시즘을 발달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랑의 능력을 잃는다. 개인이 어머니와의 유대를 끊지 않는 한 그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선의 어느 밤에 썰릴 운명에 처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레 짐작해볼 수 있다.


가래떡이 잘근잘근 썰리는 도마소리를 들으며 아이가 느낀 오싹함은 거세의 공포였을 것이다.


조선의 밤은 호러였다.


『사랑의 기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리히 프롬도 그 밤으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인 것처럼 진술한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이 사실은 지금까지 창작되어온 가장 커다란 허구다. 이 허구에 빠진 이들은 필연적으로 ‘작은 죄인’이 된다."


프롬은 부모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지배와 통제, 그리고 소유와 관련된 일종의 가학적인 것으로 본다. '나쁜 부모'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좋은 부모' 또한 바로 그렇다는 대목이 우리가 놀라야 할 지점이다.


조선의 좋은 부모상에 대해 우리는 익히 들어왔다. 아버지는 유학이고 어머니는 무속이다. 전자는 이성으로 행하는 윤리며, 후자는 본능으로 행하는 양육이다. 각자에게는 그러한 덕목에 헌신할 것이 요구된다.


문제는 그러한 언어적 덕목들 사이에 우열관계가 임의적으로 구조화되었을 때 생겨난다.


하나가 밖으로 과잉되게 부각되면, 다른 하나는 안으로 숨어버린다. 이것을 억압이라고 말하겠지만, 실은 또 다른 과잉이다. 내적으로 숨어들어간 것은 이제 표면의 과잉만큼이나 강한 과잉의 세력을 행사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와도 같다. 유학[아버지]은 조선의 의식이고, 무속[어머니]은 조선의 무의식이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목표를 쉽게 말해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한 것은 이것이 에너지 운용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까닭이다.


무의식적 에너지는 의식으로 전환될 창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과잉되어 큰 에너지라면 다양한 창구들을 통해 에너지 분배가 더욱 잘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조선의 밤은 어머니들에게는 길고 깜깜했다.


모든 창구는 VIP 대접을 받는 아버지들에게 선점되어 있었고, 어머니에게 남은 유일한 창구란 당위적 덕목으로 규정된 바로 그것, 양육의 현실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양육에 목숨을 건다.


과잉된 모든 에너지는 양육을 위해서만 집중적으로 투입된다.


소위 자기실현이니 사회적 확장이니 하는 것들이 다 막혀있는 현실에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식을 키우는 그 일뿐이었다. 그것만이 '사람구실'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소재였고, 그렇게 양육이라는 활동은 어머니가 제대로 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윤리적 평가고사가 되기까지 했다.


자식이 떳떳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과거를 치르러 가는 일은 그 어머니에게도 정말로 동일한 시험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와 자식은 운명공동체로 융합되었다. 서로 같은 몫의 죄책감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식을 제대로 된 사람으로 못 키웠다는 말을 들을까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식은 자신에게 압도적인 에너지를 쏟아붓는 어머니 앞에서 그에 부응하는 제대로 된 사람이지 못할까봐 늘상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것이 제대로 반듯하게 서지 못하면 잘리게 될 것 같은 거세공포의 정체다.


어머니를 희생양으로 삼아 그 위에 세운 세상이 반듯하고 힘있게 서있기조차 못한다면,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괘씸하고 억울했을까. 차라리 그 기둥을 잘라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것을 한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밤은 이 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


한의 특성은 심리학적으로는 수동공격이다.


분명한 가해의 의도를 갖고 있으면서 자신은 누구도 해하지 않는다는 무오한 피해자의 정체성에 눌러 앉은 채 그 의도를 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롬은 정확했다. 피학된 이의 가학행위도 가학이다.


과거에 급제한 아이들은 암행어사 출도야, 라는 호령과 함께 못된 탐관오리들을 혼내주고 그들로 인해 한이 서린 귀신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를 힘들게 한 나쁜 아버지를 쫓아내고 이제 자신이 진정한 부권의 권위자로 등극한다는 조선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커다란 회피의 동작을 본다.


마치 다른 것이 문제인 것처럼 시치미를 뗀 채, 자신에 대한 가학자를 오히려 지지하고 그것과 야합하려는 부조리한 오버액션을 본다. 정신분석에서는 반동형성이라고 부른다. 방어기제의 일종이다. 지금도 언제 들려올지 모를 무서운 도마소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함이다.


이제 제대로 된 사람구실을 하고 있으니 제발 거세하지 마세요, 라며 진짜 거세자인 어머니를 향해 그들은 필사적이다.


그들이 여전히 은폐되어 알려지지 않은 가학 속에 있는 까닭일 것이다.


은폐된 것은 계속 작동하며, 깜깜한 밤도 계속 이어진다.


가학의 역사가 멈추는 것은 윤리적 반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알아본 자각의 빛에 의해서다. 그러나 우리는 자각의 빛을 스스로 어둡게 흐리기도 한다.


자신에게 명백히 가까운 가학자를 비호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흐리게 보이는 먼 것이 대신 비난되어야 하는 법이다.


가학자로서의 자기 어머니의 면모를 지우기 위해, 그 모습은 특정 정치세력과, 직장상사와, 자신이 접하게 되는 권위자와, 또 불쌍한 심리상담사 등에게 애꿎게 뒤집어 씌워진다. 그렇게 가학의 주체를 밖에 있는 어떤 악의 형상으로 외재화한 뒤 자기 가까이에 있는 실제의 가학자는 선하고 무오한 인물로만 인식하려는 일을 지속한다.


그는 지금 그의 어머니를 대신해 누명을 쓴 무고한 이들에게 가학을 집행하는 중이다.


이것이 피학된 이가 가학자로 탈바꿈하게 되는 또 다른 은폐된 가학의 형태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했던 일을 세습해 이제 그 자식도 똑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자식은 칼이 아니라 붓[언어]으로 한다.


늦은 밤 산중에는 허공에 붓질하는 키보드소리만 깊어간다. 삐뚤삐뚤한 것들에게 윤리와 양육의 의지를 담아 은밀하게 거세의 공포를 자극하며.


조선의 밤은 정말로 길고 깜깜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이름만 대한민국이지 오늘날 우리가 조선에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화폐만 봐도 어디 고구려나 고려가 아니라 다 조선의 얼굴들이다. 조선에서 출세한 자식들과 그 어머니들이다.


자신에게 화폐가 없어지는 현실 또한 주요하게 거세의 공포를 자극하는 소재다. 거세되지 않으려면 더 많은 화폐들을 자신의 곁에 더 가까이 두어야 한다. 조선의 얼굴들을 더 자주 보며 극진하게 모셔야만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의식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우리의 문화적 문법이 되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듯, 돈을 공경하며, 또 언어로 추는 칼춤과 붓질을 공경하는 이 행동양식이 바로 입신양명이다.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자식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는 사회적 셀럽의 길이다.


선함의 표방은 과잉되고 그만큼 은폐되는 것은 가학의 의도다. 그렇게 과잉되는 것 또한 가학의 의도다.


가학이 정말로 거기에 은폐되어 있는지를 알려면 얼마나 그것이 자학적인지를 보면 된다.


자기가 다 책임져야 하는 것처럼 살고 있는 이들은 가장 자학적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죄책감에서 비롯한다.


그러니 다 자기의 잘못처럼 경험되고, 그 잘못들을 씻기 위해 완벽주의적인 태도로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책임지려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자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 자각의 빛이다.


자학은 자각으로만 멈출 수 있다.


그것이 자학이었다는 것이 자각의 빛 없이 은폐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 자학의 양식이 외부로 표출되어 필연적으로 만들어낼 가학 역시도 은폐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조선의 밤은 불을 끄고 인간이 그 자신의 몸을 밤마다 도마 위에 올려왔던 호러였다.


가학되던 것은 언제나 인간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든 가학은 반드시 모든 자학이었다.


우리는 한글만이 아니라 이 자학의 세시풍속도 조선의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물려받은 것이 다 위대한 유산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물려받은 것을 억지로 다 위대한 것처럼 만들려고 할 때 자학은 필연적이다. 허구의 왕을 옹립하려면 반드시 그 백성들이 미천해져야 하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인위적으로 신성하게 우상화하려는 이 의지로 인해 자학의 세시풍속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불을 밝혀보면 그 자리에 신성한 허깨비는 사라진다. 그에 따라 자학의 널뛰기도 사라진다. 도마 위에서의 죄책감의 마당놀이도 끝난다.


남은 것은 삐뚤삐뚤한 모양새의 나다.


더는 삐뚤삐뚤하다고 불려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 고유한 형상이다.


밤하늘의 저 별빛들처럼 떳떳한 나라는 빛이다.


자신이 스스로 밝히고자만 한다면, 조선의 밤에도 빛은 있었다.


밤이 고요해서 빛도 한층 살갑다.


그런 밤이 이제는 조선의 밤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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