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심리학 #20

"뭔지 모를 몹쓸 것"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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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떤 이를 싫어하는가. 자신의 환상을 받아주거나, 채워주거나, 혹은 아예 그 환상의 대상이 되어주려 하지 않는 이를 싫어한다.


그러나 실은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다른 이나 사물에게 환상을 부여하는 이유는 통제를 위해서다. 환상을 통해 자신에게 안전하고 우호적인 것으로 그것을 억지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시도가 환상게임이다.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것들은 자주 불편함의 대상이 된다. 불편함은 두려움이라는 표현 자체도 두려운 이들이 대신 쓰곤 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또 사람들은 어떤 이를 좋아하는가. 자신의 환상을 받아주거나, 채워주거나, 혹은 아예 그 환상의 대상이 되어주려 하지 않는 이를 좋아한다.


그리고 실은 좋아하는 것을 넘어선다. 흠뻑 매료되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환상을 깨는 이에게 매료되는 이유는 거기에서 자유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만든 환상 안에 자유를 가두고 있어서다.


환상이 일상적인 것과 다른 내용을 갖고 있다고 그것이 자유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환상은 자유에 대해 집행되는 아주 큰 통제의 의도다. 이를테면 늑대의 송곳니를 뽑고 눈을 코알라의 것으로 교체한 뒤 초원에서 오리들과 하하호호 술래잡기를 하게 만드는 것이 환상이다. 환상으로 인해 자유는 굴절되고, 변용되며, 기형화된다.


여기에 환상의 오만함이 있다. 환상은 본래 자유로운 자연을 아이로 본다. 어떻게든 유아적인 렌즈를 통해 의인화시켜 아이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야 통제에 유리해서다.


학교에서 자기의 생각대로 공부도 잘 하고 친구도 잘 사귀는 현실을 얻지 못한 이가 있다. 그는 현실의 통제에 실패했다. 그리고는 자기 방의 침대에 누워 환상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 환상 속에서 자기는 오히려 잘못된 정보를 가르치고 있는 학교선생을 꾸짖을 수도 있는 대천재이고, 친구들도 그런 그와 먼저 친해지려고 다가온다. 그는 현실에서 실패한 통제욕을 환상을 통해 대신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롭게 보이는 환상을 좋아하는 이들은 실은 자유를 원하는 이가 아니라 통제를 원하는 이다.


통제는 언제나 도구적 태도를 낳는데, 이는 자기에게 잘 통제되는 것을 쓸 만한 것으로 보는 태도다. 통제되기 어려운 것은 당연히 쓸 만하지 않은 것이 된다.


나아가 이 도구적 태도는 일그러진 도덕적 태도로 발전하게도 된다.


자기에게 쉬이 통제되지 않아 유용성이 없는 것, 즉 '못쓸 것'은 '몹쓸 것'으로까지 평가되는 것이다.


환상을 품고 사는 이들은 대개 자기가 도덕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쯧쯧, 몹쓸 것들.'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그 중립적인 의미는 단순히 '통제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자기에게 통제되지 않는 것을 나쁜 것으로 만들고 있는 이 태도는 거의 이 시대의 전염병과도 같다.


자기가 통제하기에 쉬운 '순종하는 착한 아이'를 만들고자 하는 오만한 양육자의 정신이 범람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환상이 자연을 아이처럼 만드는 작업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앎의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가 자연에 대해 어떤 것을 알았다고 간주되면, 이제 그러한 자연은 아이가 된다. 흡사 앎의 울타리에 편입된 작은 유치원생의 모습이다.


그러니 환상을 좋아하는 이들은 자꾸만 자기가 무엇인가를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는 일에 매진한다. 그들이 소비하는 환상 또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자기가 모종의 정보 내지 경험을 통해 이제는 다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식이다.


아는 척하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환상의 형태다.


이 환상에 빠져 있을 때는 자신의 아는 척을 위협할 소재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그것에 대해 쉽게 통제할 수 없이 뭔지 모를 것은 자동적으로 '몹쓸 것'이 된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뭔지 모를 몹쓸 것이다.


일부러 왜곡하고, 음해하고, 그 이와 다른 이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거짓된 이야기를 날조하고, 심지어 그러고 있던 자신을 오히려 피해자인 것처럼 세우려는 방식이, 환상을 소비하는 이들이 이 '뭔지 모를 몹쓸 것'을 대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어떻게든 그것을 나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가 또한 이런 모습이다.


뭔지 모를 몹쓸 것이다.


사람들은 실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뭔지 모를 몹쓸 것의 정확한 이름이 바로 자유라는 것을.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것을 가장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사람들은 늘 모순으로 인해 힘들어한다. 가장 원하는 것을 가장 나쁜 것이라고 스스로 규정해버린 모순 속에서 양가감정에 치인다. 이 상충하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해 머리가 뱅글뱅글 돈다.


그렇지만 그 가슴은 이미 흠뻑 매료되어 있다.


완전히 반해버렸다.


가슴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말은 이럴 때 적용하라고 쓰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환상을 깨는 자유로운 이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결코 통제될 수 없을 것 같은 그 이로 인해 얼마나 가슴이 들끓는가. 또 타오르는가.


그는 우리의 가슴에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다.


신들은 프로메테우스를 분명 그렇게 불렀다.


"뭔지 모를 몹쓸 것."


그가 설원을 향해 떠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에게 불을 가지고 오기 위해 떠난 길이었다.


그가 자유로운 것은 인간을 위해 그의 모든 자유를 쓰고 있던 까닭이다.


그만큼 인간을 사랑한 이는 없다.


자기 생각대로 다 통제하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신이 하는 일이다. 자기가 신이라고 믿는 이들, 또 믿고 싶은 이들이 환상의 열렬한 생산자가 되며 동시에 소비자가 된다.


이러한 신들의 눈에는 프로메테우스가 다만 뭔지 모를 몹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알아본다.


인간을 가장 사랑했던 이를, 인간은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처음 시작되는 것, 그것은 사랑이다.


뭔지 모르게,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에게는 시작된 것이다. 정직하게 우리가 바라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 사랑이다.


그 몹쓸 사랑이 환상게임의 몹들을 쓸어버리고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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