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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pr 24. 2024

깨달음에 관한 불편한 진실, 어쩌면 위로 #1

"깨달음의 용도"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은 꿈꾸고 싶었다는 것이다.


  삶은 꿈이다. 아주 생생한 꿈.


  이 말은 삶이 본질적으로 공허하고 무의미한 가짜라는 뜻이 아니다. 어디 멀리에 진짜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이 힙한 척하는 허무주의다. 삶은 통째로 진짜다.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면 그것은 느낌이 연쇄하는 순간들이다.


  흘러가는 시냇물의 소리, 뺨에 닿는 부드러운 바람, 들꽃의 향기, 고양이의 배냄새, 반짝이는 눈동자, 우리의 삶은 매순간이 이와 같이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분명히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삶은 느낌의 축제다.


  별빛이 비추고 있는 아주 그립고 아련한 꿈의 축제.


  우리는 이 축제에 또 어울리고 싶어서 다시 돌아온 것이며, 매순간 돌아오는 것이다.


  충만하다, 온전하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완성되었다, 태어나서 좋다, 이런 감상들은 우리가 현재의 느낌을 깊이 받아들여 음미하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어떤 허세나 위장이 없다. 우리는 다 안다.


  이것이 통째로 진짜라는 사실을.


  바로 이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일임을.


  생생한 것은 진하기 때문이다. 뭉쳐있어서 진하다. 잠시만 뭉쳐있는 것은 이내 흩어질 것이지만, 우리는 뭉쳐있던 그 느낌을 가득히 누리고 기억한다.


  흘러가는 시냇물의 소리, 뺨에 닿는 부드러운 바람, 들꽃의 향기, 고양이의 배냄새, 그리고 당신의 반짝이던 눈동자를.


  그것들을 가슴 깊이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럴 수 있어서 잘 살았다고 말한다.


  나는 제대로 얘기하고 있는가.


  우리는 바로 이렇게 꿈꾸고 싶어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사랑은 우리의 영원한 꿈이다.


  이렇게 살 때 우리에게는 깨달음이 필요하지 않다. 깨달음은 이 자연스러운 본성의 상태를 잃거나 잊었기에 발명된 여분의 장치다.


  불행히도 이 삶을 고통의 연쇄로 지각하는 우울한 이들이 있다. 종교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아예 이들을 위해 '아픈 영혼(sick soul)'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들은 느낌들이 자신을 찌르고 위협하는 것처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간절하다.


  이 아픈 꿈에서 깨어나는 일만이.


  그래서 깨달음이 탄생했다. 또는 깨달음이 꿈꾸어졌다.


  깨달음은 꿈에서 깨기 위한 꿈이다.


  이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한 자각의 장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 용도로 쓰일 때 깨달음은 깨달음의 의의를 갖는다.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함께 얻는다.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비롭고 천재적인 장치였던가를 이해하게 된다.


  깨달음에 특별한 스승의 인가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것을 어떻게 인증하는가?


  또한 깨달으면 자기가 본성의 자리를 회복한 것을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게 된다. 자기가 지금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를 남에게 확인받거나 인정받아야 알 수 있는 상태라면, 이미 눈을 뜨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꿈을 깨기 위한 꿈의 용도로 쓰일 때 깨달음은 이와 같은 면모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용도에서 깨달음은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욱 굴절시키며 힘겹게 만든다.


  조악한 예로, 과잉섭취된 음식물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화제가 그 자체로 신성하게 추구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하루에 소화제 30알을 먹는 사람이 더 놀라운 인격적 경지에 오른 시대의 큰어른처럼 추앙되고, 소화제 복용의 정도가 성장과 완성의 지표가 되어 인간에 대한 평가의 척도로 작용한다.


  이것은 아무래도 불편한 코미디와 같은 일이다.


  무엇보다 몸에 불편하다.


  깨달음이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간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치트능력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무협지에 나오는 궁극적 비공의 내용물도 아니며,  SF 속 슈퍼히어로들이 지닌 신비한 힘 같은 것도 아니다. 나아가 깨달음은 높은 영성수준을 의미하지도 않고, 신에게 구원받았다는 증표도 아니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기나긴 고통을 버텨낸 끝에 그 영웅적 공로를 인정받아 취득하게 된 영혼의 훈장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다 깨달음의 남용이다.


  용도를 남용하면 아무리 좋은 약도 독이 된다.


  독을 자꾸만 복용하면 중독이 된다.


  중독의 특성은 중독재와 싸워 이기기 위해 계속 중독상태를 지속하려 한다는 것이다.


  삶의 중독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어떤 성장의 지표나 수준의 증거로 남용하는 이들은 실은 삶과 싸우고 있는 것이며, 삶에 대한 최종적인 통제권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아주 쉽게 권력욕이라고 말한다.


  "이 꿈은 내 꿈이니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 통제할 수 있어야 해."


  우리는 이러한 삶의 중독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꿈에 빠져 있는 상태다.


  더 쉽게는, 깨달은 척하고 있는 상태다.


  깨달은 척하는 이유는 권력을 얻고 싶어서다.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어떤 신비한 권력자로 봐주길 바라서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초등학교 반장으로 자신의 엄마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과 근본적으로 같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이처럼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한 모든 용도로만 쓰이고 있다면 깨달음의 발명자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다.


  깨달음이 성숙함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한데, 이는 인격의 수양을 통해 성숙해진 이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원래 성숙하다는 사실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유효한 말이다.


  성숙해져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깨달으면 성숙함을 바로 회복한다.


  깨달은 척하는 일은 권력욕이라고 하는 유아적 고집의 상태를 은밀하게 지속하려는 일이다. 바로 그러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척하는 이들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자기보다 낮은 아이처럼 보인다. 그런 아이와 같은 존재들을 자기가 더 품어주고, 수용하며, 알아주어야 한다고 믿게 된다. 자기가 다 책임져야 한다고도, 자기 없으면 다들 똑바로 살 수 없다고도 생각하게 된다.


  자기 자신이 아이의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이 아이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깨달음의 용도가 장 굴절된 방식이다.


  깨달음이 꿈을 깨기 위한 꿈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피터팬과 같은 아이의 꿈을 가장 신성한 꿈으로 유지하기 위해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포유류의 꿈이라고도 말해보자.


  따듯한 유대감이 지구에 넘실거리는 꿈.


  아주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꿈이다. 새끼고양이의 몸짓처럼.


  자기 자신이 바로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싶었을 것이며, 또 그 사실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자기 자신의 꿈을 꾸고 있었고, 그 꿈을 계속 붙잡고 싶어 깨달은 척을 했다.


  우리의 꿈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자기 자신이 보고 싶었던 자기 자신을 꿈꾸며, 그런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만큼 외부에서 반대자들을 만들어내 그에 저항하며 싸운다. 근본적으로는 다 섀도우 복싱이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었던 우리 자신이 될 자유가 있다.


  이 세상은 그러라고 만들어졌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가 보고 싶었던 우리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우리 자신을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삶은 창조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만나며, 기뻐하는 그 과정.


  이렇게 어여쁘게 잘 만들어져 이토록 사랑스럽게 존재한다니.


  기쁘고, 나는 또 기쁘다고, 우리는 기나긴 매순간을 고백해왔던 것이다.


  이 근원적인 창조의 본성을 잠깐 망각한 이들이 자주 하는 일은 언어로 자신을 만든다고 하는 일이다. 자기를 이야기로 창조한다고 말한다. 그런 것은 단지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것일 뿐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조악하고 열화된 꿈을.


  깨달은 척하는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서사의 힘을 강조하고, 자기를 초라하게 짓눌러왔던 거대서사의 억압에서 깨어나 이제는 미시서사를 통해 특별한 내 자신의 주체를 바로 세운다고 주장한다.


  권력욕이 표현되는 또 다른 형태다.


  권력욕은 사악한 것이 아니라, 아주 힘겹게 매우 돌아가는 길이다.


  용도는 편의성에 대한 것.


  쉽고 빠른 것이 좋은 것이다.


  깨달은 척하는 것보다 깨닫는 것이 압도적으로 쉽고 빠르다.


  심지어는 깨달음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삶을 바로 향하는 것은 더욱 쉽고 빠르다.


  저 별빛은 이미 우리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와있다.


  당신의 눈동자가 반짝이던 이유다.


  나는 그것을 영원이라 기억할 것이다.


  통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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