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도시"
작은 것들이 아름다운 도시. 서울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서울도 분명 그렇다.
오히려 큰 것들을 기획하면 여지없이 투박하고 촌스러운 결과로 드러난다. 누가 한민족의 기상이 웅장하다고 그랬는가. 그런 것은 열등감이 꾀해보는 정신승리의 의도다. 애초 작은 것을 열등한 것이라고 착각해서 생겨난 생각이다.
심리학은 작은 것에 대한 학문이다. 작은 것의 깊이를 발견하는 그 일을 한다. 반대로 철학은 큰 것에 대한 학문이다. 이것은 큰 것의 깊이를 발견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깊이의 위상은 동일하다. 동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의 깊이가 드러나는 일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심리학이 철학처럼 거대담론이 될 수 없는 것은 이처럼 미시적 사건의 깊이를, 그럼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심리학적 도시다. 서울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서울도 분명 그렇다.
이것을 어떤 예민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민해서 작은 것도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러나 사람들의 상황이 단지 각박해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작은 것을 중요하게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보는 것은 어떤가. 이렇게 말하면 이제 예민성이라는 표현은 감수성이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릴 수 있게 된다.
감수성은 작은 것도 깊게 느낄 수 있는 성질이다. 심리학은 분명 이 감수성의 학문이다. 심리학을 탐구하는 기초의 태도가 그러하고, 더 근본적으로 그 탐구의 대상인 심리라는 것 자체가 그러하다. 아주 섬세해야만 접근가능한 것이다.
결이 무척 고운 도시라고 누군가가 서울을 그렇게 경험한다면, 그는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결을 경험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대하는 그 섬세한 태도. 작은 것에도 예민해서 상처받거나 화를 낸다면, 거기에는 아무리 작은 마음이라도 그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실은 포착하고 있는 아주 섬세한 시선이 있는 것이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개방하는 그 심리학적 시선이.
그러나 우리 자신이 이처럼 작은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 않을 때는, 이 작은 것에 대한 방향성은 보통 두 갈래로 굴절되어 드러난다.
첫 번째는, 작은 것을 열등하게 간주해서 생겨나는 그 태도, 곧 허세와 허영이다. 이 허세 및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선과 기만도 출현한다. 자기를 어떻게든 크고 대단한 것으로 위장하려는 이 태도는 빈번하게 서울의 밤하늘을 밝히거나, 광장을 가득 메운다. 축제와 시위는 같은 것이다. 그것은 커다란 소재를 만들어 그 안에 자기를 참여시킴으로써 자기 또한 큰 것으로 보이려는 장치다.
두 번째는, 작은 것을 과잉되게 예찬하려는 '소소주의'의 태도다. 이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변된다.
"하찮아서 소중해."
정말 흥미로운 것은, 요즘엔 뭔가 좀 허술하고, 로우테크처럼 덜 갖추어졌으며, 어딘가 빈틈이 많아서 하찮아 보이는 것을 사람들이 열렬히 지지한다는 것이다. 가게도 정성을 들여 하나의 작품처럼 잘 꾸며놓으면 안된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다 부질없는 노력이었던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어떤 하찮음의 분위기를 가득 풍겨야, 오히려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다.
이것은 일본의 와비사비의 감각과는 또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여백의 미나, 포틀랜드의 힙스터 분위기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오히려 그런 완숙한 빈티지의 정서와는 상반된 모종의 유치함의 냄새가 묻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자기도 한번 해보겠다고 아장아장 걷는 병아리의 몸짓 같은 것, 쇼파 위로 올라오고자 계속 점프를 시도하는 아기고양이의 울음소리 같은 것, 또는 유치원생이 반나절 동안 열심히 그린 엄마아빠의 얼굴 같은 것이 그러하다. 뭔가 너무 하찮아서 애틋한 그 모습에 다소간의 '심쿵'이 자극되는 그 감각일 것이다.
서울은 이 두 가지 형태의 굴절이 만연해 있는 도시다. 그래서 분명 작은 것들의 도시이면서도 그 깊이는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섬세함이 매우 자주 예민함으로만 경험되곤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작은 것에 대한 두 굴절이 실은 하나의 귀결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허세 및 허영의 태도와 소소주의의 태도는 상반된 방향성을 갖는 것 같지만 실은 동일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전자는 작은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외부에 대단하고 큰 것을 만들어내어 그것과 합일하려는 것이며, 후자는 작은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외부에 하찮고 작은 것들을 만들어낸 뒤 이제 그것들을 알아주고 품어주는 큰 것으로 자신을 설정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는 공통적인 목소리를 갖는다.
"하찮은 내 자신이 싫어."
허세와 허영은 알기에 쉽다. 그러나 소소주의는 이 목소리를 은폐한다. 그래서 우리는 심리학적 물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하는 이에게 정작 그 자신은 어떻냐고 묻는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이 하찮아서 너무 소중하다고 말하는 이에게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너무나 하찮은 자신도 정말로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냐고.
문명화된 도시의 생활 속에서 개인이 그 자신을 하찮게 경험하게 되는 경우는 빈번하다. 어떻든 간에 자신은 이 고도로 짜여진 시스템 앞에서 더욱 하나의 부품인 것 같아 무력감을 경험한다. 그렇게 자신이 하찮은 존재처럼 생각될 때, 우리가 그 탈출구로 자주 꿈꾸곤 하는 소재는 결혼이다. 정확히는 자녀를 갖는 일이다. 그렇게 작고 하찮은 존재를 자신의 옆에 두게 됨으로써, 자신은 이제 작고 하찮은 존재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 작고 하찮은 존재를 지키고 돌볼 수 있는 어떤 상위의 입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실은 허세와 허영의 태도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발달된다. 그 작고 하찮은 자신의 자식 같은 것을 크고 대단한 것으로 키워주겠다는 의도가 허세와 허영의 태도를 낳으며, 나아가 위선과 기만을 작동시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무엇일까?
작은 것들의 도시가 엄마들의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작은 것들이 스스로 아름다운 그 마음결을 드러내던 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자상한 엄마가 만들어내는 마법의 치맛바람 같은 것을 통해서만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작은 것들은 오히려 못난 것들처럼 되었다.
깊이 없는 큰 것이 작은 것들을 돌본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작은 것의 깊이를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을 철학의 부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서울은 심리학적 도시이나, 동시에 철학이 부재한 도시다. 큰 것의 깊이가 탐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큰 것을 하려고 하면 늘 투박하고 촌스러워지는 것이다. 철학이 없는 곳에서는 늘 이 일이 일어난다.
큰 것의 깊이가 탐구되지 않을 때, 그 큰 것의 자리에는 거짓의 큰 것이 온다. 그래서 자기가 대신 큰 것인 척하며, 참되게 큰 것인 척한다. 그 실체는 앞서 말한 그것이다. 작고 하찮은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 태도들.
철학이 부재하는 도시에서는 원래 어벤져스들이 설치게 된다. 자기가 도시를 구원하는 어떤 위인이자 큰어른으로 자임하는 이들이 무수히도 창궐한다. 하찮아서 소중한 이 모든 것을 자기가 지키겠다며, 자신이 제일 큰 것인 척을 한다.
그러면 철학은 묻는다. 정말로 큰 것을 묻는다. 그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발견하도록 물으며, 그런 큰 것 앞에서의 그 자신을 발견하도록 묻는다. 그럼으로써 그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린다. 시작의 자리. 자신이 그저 자기 자신인 그 자리로.
심리학은 작은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이 드러나도록 탐구하며, 철학은 큰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이 드러나도록 탐구한다. 그러니 그 둘 역시 반대의 방향성 같지만, 동일한 깊이를 개방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깊이, 그 아름다움을.
그래서 가장 심리학적인 것은 가장 철학적인 것이고, 가장 철학적인 것은 가장 심리학적인 것이 된다. 자기 자신에게서 자연스러운 역설을 이룬다. 가장 섬세한 자신이 가장 대담한 자신으로 동시에 드러나며, 가장 작은 자신이 가장 큰 자신으로, 또 가장 하찮은 자신이 가장 온전한 자신으로 함께 알려진다.
그러니 작은 것들의 도시라는 표현은, 표현 그 이상의 것이다.
온전한 것들의 도시, 온전한 사람들이 온전한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바로 그 현실에 대한 묘사다.
작은 것들이 스스로 온전해서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온전함으로만 아름다운 도시. 그래서 다만, 온전한 것들이 아름다운 도시라고만 불릴 그 이름. 서울이 그 이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서울의 깊이다. 동시에 그러한 현실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우리 자신의 깊이다. 우리는 이제 그 깊이를 한번 살아가보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