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영웅(ordinary hero)"
비단 그대뿐이겠는가.
구원자를 찾아온 기나긴 역사였다. 구원자를 기대하거나, 구원자가 되려 했던 그러한 역사였다. 아마도 이 역사를 영웅주의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대여, 영웅이란 무엇일까?
바로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자다.
그대가 이 영웅으로서의 구원자를 찾아온 이유는, 그대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 앞에 그대는 대단히 정직했다.
죽음의 두려움에 정직하지 않은 이들을 기다리는 두 길은 각각 허무주의와 쾌락주의다. 그리고 이 두 길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직한 이들이 택하는 길이 바로 영웅주의다. 그대가 그러했다.
영웅주의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그 두려움과 싸우는 길이다. 뜨거운 길이다. 그대가 누군가를 영웅으로 보며 그를 숭배할 때도 뜨겁고, 그대 자신이 영웅이 되려 할 때도 뜨겁다.
그래서 그대가 영웅주의 속에서 구원자를 찾는 한, 그대는 늘 뜨겁게 화가 난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영웅주의가 제공하는 가장 큰 이득이다.
영웅주의는 뜨거운 도취 속으로 그대 자신을 늘 밀어넣는다. 그래서 그대는 언제나 시비거리를 찾고, 비난할 대상을 선정하며, 정의의 화라는 이름의 뜨거운 감정 속에 그대 자신을 취하게 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대는 자신의 일상을 망각할 수 있게 된다.
이 망각의 이득을 그대가 거듭해서 취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대는 일상의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는 까닭이다. 바로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죽게 되는 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럴수록 그대는 영웅주의적 감정을 더 고취시켜 목소리를 드높인다. 술에 취한 이가 내지르는 고함과도 같다. 그러한 행위 속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이 더 강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낄지는 모르겠으나, 그대를 보는 모든 이는 알고 있다.
그대가 얼마나 심각하게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그대가 얼마나 쫄아든 존재인지를.
그대여, 이처럼 영웅주의에 빠질수록, 그대는 그대의 두려움만을 더 심화하게 될 뿐이다. 극복되는 것은 없다. 영웅주의는 그저 끝없이 그대의 두려움과 싸우는 길일 뿐이다.
이것은 단순하다.
영웅주의는 영웅상에 대한 추구다. 그리고 영웅상은 영웅이 아닌 이들이 꿈꾸는 것이다. 때문에 영웅주의에 입각한 영웅상을 그대가 추구할수록, 그대는 그대 자신이 결코 영웅일 수 없는 현실만을 강화하게 된다.
그대여, 이것은 소모적이다. 될 수 없는 길이다. 할 수 없는 길이다.
그대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분명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정확한 길로 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대에게 이러한 예를 들려줄 수 있다.
그대여, 목숨을 노리는 자객 30명을 앞에 두고 큰소리를 지르며 휘황찬란하게 칼질을 하고 있는 어떤 이와, 마찬가지로 자객들을 앞에 두고 후루룩 라면을 끓여 먹은 뒤 설거지까지 하고 있는 또 다른 이가 있다.
그대는 이 둘 중 어느 쪽이 진짜 고수로 보이는가?
영웅주의는 분명 죽음의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주의가 아닌 진짜 영웅은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이다.
이에 따라, 진짜 고수는 그의 일상에서 현란한 무공을 펼치기보다, 설거지를 한다.
왜냐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수한 가능성 속에서 의연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죽음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있다는 바로 그 반증인 까닭이다. 바로 이렇게, 호들갑스러운 그 모든 일을 뒤로 한채, 진짜 영웅의 면모가 자연스럽게 알려진다.
그리고 그대가 이와 같다.
그대가 늘 이러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이 일상 속에서, 늘 가장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을 의연하게 해옴으로써, 이미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있는 그대 자신의 면모를 스스로 증거해온 그대다.
그러한 그대의 이름은 생활영웅(ordinary hero)이다.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도, 설거지를 하고, 고양이 응가를 치우고, 화장실 변기때를 닦고, 재활용쓰레기를 버리고, 이불빨래를 하며, 그 모든 생활을 정성스럽게 지속해나가는, 그렇게 그 모든 삶을 귀하게 긍정해나가는, 이 소중한 일상 속의 진짜 영웅의 이름이다.
그대여, 생활영웅이여.
기나긴 역사였다.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대가 진짜 영웅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기나긴 무용담이었다.
그대에게 구원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생활에게, 삶에게, 자신을 영위해줄 바로 그대가 구원자였던 것이다.
무수한 죽음의 가능성 속에서도 늘 생활을 먼저 생각하며 삶을 긍정하고 있는 그대는, 그래서 생활의 영원한 영웅이다. 생활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