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계절을 지나며
삼위일체의 구도에는 효용성이 있다.
그것은 각각의 고유한 타자성을 보존시켜준다. 상호적인 견제 속에서 긴장을 이루는 삼각 구도는, 그 역학적 긴장으로 말미암아 각각을 개별화시키는 자각을 이끌어낸다. 더는 친구라는, 연인이라는, 동료라는, 가족이라는 이름 속에 하나로 융합되어 묻어갈 수 없는 타자를 발견하게끔 한다.
우리의 삶에서 타자를 발견하고 또 영접하게 되는 정도만큼 우리는 성숙해지는 것이다. 무르익는다. 한 여름의 햇살이 키워낸 과실처럼.
이 영화는 이처럼 발아하고 싶어, 바람에 날리고, 땅 위를 구르며, 비에 젖어가는 세 씨앗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 이들이 드러내는 주요한 태도는, 무시와 무기력과 의존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주인공들이 외부의 타자를 어떠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애착과 책임성과 결단력이다.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에게 부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속성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그러한 타자의 속성들을 주머니 속에서 빛나는 휴대폰 불빛처럼 감출 수 없는 자신으로서 노출하며 살아간다. 영화는 이 지점을 섬세하게 묘사해낸다. 이것이 핵심인 까닭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과, 실제의 삶으로 드러나는 자신이라는 사실이 다르다는 것, 이것이 모순이다. 그래서 이것은 다시 한 번, 모순의 계절을 관통해가는 세 청춘의 이야기다.
모순은 우리를 흔든다.
청춘이 흔들리는 것은 모순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 문제 없이 순수한데, 세상이 문제로 가득찬 더러운 곳이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장 더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다.
청춘은 스스로를 더럽지 않은 순수한 것으로 남기기 위해, 거리를 두고, 쿨한 척 하며, 쾌활한 웃음으로 무장한다. 그렇게 더러운 것과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거리를 벌리면 벌릴수록, 현상은 더욱 눈에 잘 들어오게 된다. 그 끝에 청춘은 결국 목격하게 된다. 그 더러운 것이 자신의 모습이며, 동시에 자신이 그 더러운 것을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여기에서 더러운 것의 정확한 이름은 곧 타자다.
그러한 까닭에, 청춘은 타자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면서도 그 품에서 스스로 도망치며, 또한 타자를 자신의 품에 안기를 원하면서도 그 타자를 스스로 밀어내는 양가적 모습을 보이게 된다. 원하면서 금지한다. 반대되는 힘의 충돌이며, 그로 인한 긴장이다. 긴장이 낳는 흔들림이다.
그래서 청춘은 결코 정직하지 않다. 자신의 겉과 속이 같다는 투명함의 증명을 위해 위악적으로까지 연출한다 해도, 모든 청춘은 근본적으로 거짓말쟁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의 전문가들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모든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ㄷㄹㅇ은 '더러워'가 아니라 '두려워'의 약어다. 더러운 것은 사실 두려운 것이다. 청춘은 타자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이 자신 아닌 것이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라는 작은 감옥[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아닐 수 있는 커다란 자유의 하늘을 소망하기에 청춘은 두려운 것이다.
크게 소망하는만큼 크게 두려워진다. 우리는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키르케고르의 말은 진실로 옳다.
바로 이 소망으로 말미암은 두려움에 대한 자구책으로, 우리는 무시하고, 무기력해지고, 의존하게 된다. 자승자박에 빠진다. 순도 100%의 오렌지주스 같은 자신을 지키면서도 삼겹살의 맛이 날 수 있기를 고집하기에 그 고집이 스스로를 동여묶게 되는 것이다. 모순 속에서 자기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또 한 번, 깨어나고 싶어서 흔들리는 세 알의 이야기다.
흔들림은 언제나 새로운 것의 태동을 알리는 전조다.
청춘이 흔들리는 것은 이 새로움의 가능성 때문이다.
타자는 새로움의 열쇠다. 흔들림의 주동자는 타자다. 타자에 의해, 또 타자를 향해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곧 자신이 그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을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을 이해할 때, 타자는 자신의 순수함을 위협하는 더러운 것 내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알 밖에서 자신과 함께 껍질을 쪼아주고 있는 조력자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줄탁동시의 비유다. 이처럼 타자를 자기의 껍질 안으로 영접할 때, 소망은 실현가능해진다.
씨앗은 햇살을 영접함으로써 열매가 되고, 알은 다른 새의 부리를 영접함으로써 새가 되며, 청춘은 타자를 영접함으로써 비로소 노래할 수 있게 된다.
자유로운 공기처럼 살기를 소망하는 이라면, 먼저 외부에 자기 아닌 타자로서 존재하는 자유로운 공기를 깊게 흡입해야 한다. 그래야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자유로운 공기처럼 노래할 수 있다. 하늘을 날며 노래하는 새처럼, 자유로운 공기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타자의 거부로 인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우리 자신의 거부로 인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이 타자를 거부하는 폐색의 상태, 이것이 곧 모순이다.
그리고 모순의 해법은 상기한 것처럼, 타자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 말미암아 자유로운 현실을 향하는 것이다.
이 현실은 다시금 만남의 현실로 불리운다.
모든 흔들림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어떠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래서 청춘은 그저 지나가는 계절이 아니다. 언제나 다시 또 새롭게 시작되는 계절이다. 우리가 늘 만나고 싶어하는 까닭이다. 닫힌 모순의 계절을 지나, 열린 만남의 계절로 우리는 향해간다. 끝나지 않는 계절이 시작된다. 끝없는 만남이 이어진다. 노래는 계속된다.
삼위일체의 구도에는 분명 효용성이 있다.
자신의 노래 앞에 메아리가 묻히는 일이 없이, 자신이 부른 노래가 바로 자신이 듣기를 소망하던 그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메아리는 다른 각도에서 분명하게 알려오기 때문이다. 이렇듯 메아리처럼 울리는 타자의 노래 속에서 자신의 노래를 발견하고 또 영접하며 청춘은 무르익는다.
노래는 진동이며, 흔들림이고, 곧 만남이다. 새는 바로 이 노래를 통해 자유로운 존재로 깨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