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심리학 #12

"분열의 현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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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장 희망적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우리는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어있는 이는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지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가져봐야 합니다. 저기 멀리 말머리성운에 있는 작은 별에 크왕트왕이라는 미지의 존재가 살고 있다고 설정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그 크왕트왕을 두렵게 느끼는 것일까요?


정직하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기에 크왕트왕은 너무 멀리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단순한 미지성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근접거리에 있는 미지성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밀하게는 미지성도 아닙니다. 근접거리라는 말 자체가 이미 관찰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근접거리에서 관찰가능한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관찰의 결과로 인해 두려워집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크왕트왕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외관이 직립보행을 하는 신장 3미터의 바퀴벌레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할 때, 바로 그렇게 관찰된 모습이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것 같기에' 우리는 두려워집니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려움을 야기하는 속성들로부터 다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동안 자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만치 먼 추상입니다. 동시에 실제 자신의 죽음이 실시간으로 다가왔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관찰할 수도 없습니다. 관찰은 거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근접거리조차도 생길 수 없는, 자신과 그 체험의 동일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사실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죽을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을 것 같은 상황'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이미 경험했던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곧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즉, 이미 그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역설적 상황입니다.


곧,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죽을 것 같은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며, 동시에 그 상황은 사실 우리가 성공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우리 존재의 승리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우리 존재의 힘을 망각하고 계속 두려움 속에서 위축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역설을 역설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핵심적 이유는 분열 때문입니다. 분열은 지배와 통제의 의도가 발생시킵니다. 즉, 분열을 조장하는 주체는 자신이 제일 높은 존재로 행세하고 싶어서, 끝없이 분열을 만들어 냅니다.


주변에서 이간질을 잘하는 친구를 떠올려보면, 결국 그 친구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이간질시켜 편을 가른 그 어느쪽에서라도 자신이 중요한 존재로 대접받게 되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쪽에는 이 얘기를, 저쪽에는 저 얘기를 실어나르며, 그렇게 자신의 정보제공으로 인한 사람들의 반응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이간질의 주체는 자신이 사람들을 통제하며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인기에 목마른 이가, 바로 이러한 분열의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소망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을 것 같은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죽음이 두렵다고 할 때, 실제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분열의 상황에 빠지게 했던 특정한 대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가 조장한 그러한 상황이 우리에게는 '죽을 것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때라도, 자신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차갑게 버려져서, 점점 조여오는 칠흑같은 공간 속에서 홀로 숨이 막혀 죽게 될 것 같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주로 어떤 때 그러한 두려움을 경험하는가 하면, 그의 주변에서 싸우는 상황을 목격하고, 동시에 그 싸움의 당사자 중 하나가 그에게 선택을 종용할 때입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그와는 관계를 끝내겠다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럴 때면 그는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을 경험했을지 모릅니다.


아빠와 엄마가 싸운 날 어느 새벽, 아이였던 그가 자고 있던 방으로 엄마가 소리없이 들어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이러한 말을 들려주었을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갑돌이가 엄마 편을 안들어줘서, 엄마가 아빠한테 졌어. 엄마는 더는 저렇게 못된 아빠하고 같이 살 수가 없단다. 엄마는 갑돌이를 너무 사랑하고, 갑돌이가 착한 사람이란 것도 다 알아. 착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우리 갑돌이가 현명하고 어른스럽게 이해해봤으면 좋겠어. 우리 갑돌이마저 아빠를 닮아 못된 사람이 되면 엄마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 집에서 더는 살 수 없으니, 멀리 떠나야 할 것 같아. 아빠는 못된 사람이라 엄마가 집을 나가면 갑돌이를 고아원에 보낼텐데. 그러면 우리 갑돌이는 고아라고 애들한테 맞으면서 많이 무서울텐데. 엄마가 갑돌이를 지켜주고 싶었는데 미안해. 갑돌이가 착한 사람이어야 엄마가 지켜줄 수 있는데 미안해."


사실 이러한 묘사보다는 더욱 은근하고, 더욱 대하서사시이며, 더욱 교묘하게, 소위 '친절하고 정감어린 드라마'로 행사되는 것이 이간질입니다.


"너의 힘겨움을 알아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 나 말고는 네 적이야."


이간질의 대표적인 대사입니다.


그리고 이 분열을 조장하는 대사 앞에서 갑돌이는 분열되었을 것입니다.


아빠도 너무 사랑하고, 엄마도 너무 사랑하던 갑돌이는,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분열시켜야 했을 것입니다. 아빠를 억지로 악마로 만들어, 자신의 가슴 속 가장 추운 변두리로 아빠를 추방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아빠에 대한 사랑은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빠를 배신했다는 마음에, 갑돌이는 아빠를 보는 일에 너무나 죄책감을 느껴, 그 죄책감을 숨기기 위해 이제는 아빠를 차갑게 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변의 누군가가 "너 왜 너희 아빠를 그렇게 대해?"라고 물으면, 갑돌이는 이렇게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저 사람 못되고, 악하고, 차가운 사람이야. 언제라도 나를 죽일 수 있는 폭력적이고 무서운 사람이야."


매일, 불꺼진 식탁 한귀퉁이에서 콩자반과 김치쪼가리로 홀로 소주 반주를 하다가, 거실 쇼파에서 꾀죄죄한 잠옷 차림으로 몸을 웅크리고 소리없이 잠드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갑돌이가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새벽에 물 마시러 부엌에 갔다가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게 되면, 그 마주친 눈빛에 훌쩍 반가운 미소가 솟아올랐다가도, 바로 눈길을 피하며 표정을 흐리는 그의 수줍은 아버지를, 갑돌이가 대체 어떠한 악마로 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갑돌이 자신이 정말로는 대체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었는가를 잊은 이야기입니다.


갑돌이를 '죽을 것 같이' 두렵게 만든 것은, 갑돌이가 분열되기를 요구한 그의 엄마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깜깜한 곳에 갇혀 죽을 것 같은 그 두려움, 그것은 그가 엄마에게 느낀 바로 그 두려움입니다. 엄마가 그의 숨통을 조여오며, 숨도 못쉴 정도로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기에, 그토록 그의 인생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했기에 그가 경험하게 된 생리적 상태입니다.


이처럼 갑돌이가 그의 엄마를 가장 두려워하며, 그러한 까닭에 그의 엄마에게 몹시 화가 나있다는 사실이 망각되는 이유는, 이 또한 분열 때문입니다.


갑돌이는 엄마가 자신에게 언제나 우호적인 존재일 것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무조건 자기 편이고,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있는 존재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분열을 조장하는 이간질의 목소리는 언제나 부드럽고 달콤하기에, 우리는 바로 그렇게 믿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분열됩니다.


이것을 극단적인 예로 비유하면, 엄마에게 계속 귀싸대기를 맞으면서도, "갑돌이가 먼저야."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인자한 표정 때문에 갑돌이는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말과, 그 표정을 믿고 싶었기에, 갑돌이는 퉁퉁 부은 뺨의 아픔을 망각하고, '엄마가 나를 아프게 할리 없어.'라며 '자기 자신이 실제로 느까는 현실'과 '자기 자신이 그렇게 믿는 현실'을 분열시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실이 두쪽이 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쪽이 나게 된 분열의 책임이, 갑돌이는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엄마가 여전히 '착한 사람인데도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그리고 아빠가 여전히 '못된 사람에서 좋아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자신이 더 똑바로 잘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간주하게 됩니다.


특히 자신이 제일 먼 곳으로 추방시킨 아빠가 갑돌이에게는 주된 고통의 이유가 됩니다. 분열의 너비와 고통의 강도는 정비례합니다.


"꼴보기 싫은 인간, 나이 쳐먹고 맨날 집에서 구질구질하게 저게 뭐하는 짓이야. 저 인간 언제 똑바로 살아 대체?"


혹여 갑돌이가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할 때면, 엄마는 오히려 그러한 갑돌이를 좋은 말로 달래며, 우리가 그 사람의 적폐는 청산하되, 그 사람 또한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며 그가 일어설 수 있도록 지켜봐야 한다고, 사람 자체를 미워하면 안된다고, 부드럽고 지혜로운 스승처럼 갑돌이를 깨우쳐주곤 합니다.


갑돌이의 뺨을 사정없이 때려대던 그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 갑돌아, 이제 그만해.


갑돌이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갑돌이는 이제 이해해야 합니다.


갑돌이가 이렇게 계속 힘든 이유는, 계속 죽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엄마에게 죽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죽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죽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했으나, 강요된 분열 속에서 오히려 그 반대로 미워하게 된, 그렇게 우리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유폐되어 버려진 그이가, 여전히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그이가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크왕트왕으로 만들어 저 멀리 말머리성운에 갖다버린 그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먼 곳에서도, 조용하게, 행여나 피해라도 줄까봐 눈치 안채이게,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그이가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망각했기에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가 실제로 두려워했던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를 성공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 해주었던 승리의 힘입니다. 바로 우리 존재의 힘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러한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 우리에게는 과도한 생존에의 예민함이 생깁니다.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자신의 놀라운 생존력을 확인하지 못한 까닭에, 계속 더 큰 생존력에 집착하게 되는 셈입니다.


생존력은 자신의 현실을 지키는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가장 위대한 생존의 힘은 바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생존력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생존력의 놀라운 점은, 우리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보다,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분열도 실은 우리가 더 사랑할 수 있는, 우리 존재의 힘이 만든 현실을 깰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갑돌이에게 수없이 때리던 귀싸대기도, 그러한 엄마조차도 사랑하고자 했던 현실을 깰 수 없었습니다. 아빠를 악마로 만들어 추방시킨 그 차가운 협박도, 그러한 아빠를 계속 사랑하고자 했던 현실을 깰 수 없었습니다.


그 어떤 분열의 이간질도, 그 분열을 조장하는 주체가 발화하던 "나만이 너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는 달콤한 말도, 진실한 사랑의 주체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현실을 깰 수 없었습니다.


사랑에 목마른 이가 분열을 조장합니다. 애정결핍이 이간질을 만듭니다. 그렇게 자신이 가장 영향력 있는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자신이 이간질시킨 양쪽에서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곧 분열을 만드는 의도입니다.


바로 이러한 목마른 이에게도, 우리는 관심의 물을 주었습니다.


그가 의도한 바대로 분열되어줌으로써, 그에게도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가장 애정이 결핍된 이에게도, 충분한 사랑을 건넸습니다.


그러한 분열의 주체마저도 죽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분열의 주동자마저도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망각하고 있을 때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실제로 두렵게 하던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조차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었던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때, 그렇게 우리 존재의 힘을 기억할 때, 우리는 더는 두렵지 않습니다.


분열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우리 존재의 힘을 망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야 우리가 망각한 그 힘을 분열의 주동자가 얻어먹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그 분열의 주동자는 자신의 애정결핍을 채울 수 있는 까닭입니다. 마치 우리가 역으로 애정결핍이라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그 주동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 같은 구조를 성립시킴으로써, 자신은 점잖고 안전한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 말은, 다시 한 번,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지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니라 분열의 주동자 자신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모든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역으로 떠넘긴 구조에 따라, 그러한 그의 감정을 마치 우리의 것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이 두려워하고 있던 분열의 주동자의 두려움을 대신 느끼고 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를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우리 자신이 대신 힘들어하고 있던 것입니다.


물이 더 넓은 곳으로 흐르듯이, 우리의 존재의 크기가 그 분열의 주동자보다 컸던 까닭입니다. 그가 혼자서 처리할 수 없던 두려움을 그릇이 더 큰 우리가 대신 받아주고 있던 것과 같습니다. 스승과 같이 더 큰 존재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기만을 원하던 그 작은 어린아이 같은 주체를, 우리는 모르는 척 사랑으로 품어주고 있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존재가 자연스럽게 사랑을 발휘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자신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가 죽었어도, 죽지 않았어도, 아무 관계없이 우리는 그를 사랑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정말로 죽음을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조건을 넘어서 있는 사랑 자신만을 압니다.


때문에 우리가 두려운 것은 오직 하나, '사랑을 잃을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것이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의 정확한 묘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존재가 사랑인 바, 우리는 사랑을 잃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은 잃을래야 잃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대체 우리가 무엇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죽음이 두렵다고 경험할 때, 우리는 대체 누군가가 그렇게 우리를 죽일 것 같이 두려운지를, 그리고 동시에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를 사랑하고 싶었는지를 기억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의 상황 속에서 언제나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마지막 존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만 하면 됩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분열 속에서도 죽지 않는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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