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 회복의 양자도약"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은유로 전하고자 하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은유는 정말로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표현 그대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님'이라는 존칭이 붙듯이, 이 '하나'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대단히 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은유하건대, 몸은 '있이 계신 하나님'입니다. 가시적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없이 계신 하나님'입니다. 비가시적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은 하나님입니다. 결코 따로 놀지 않습니다.
이를 다시 표현하자면, '몸은 보이는 마음'이고, '마음은 안보이는 몸'입니다. 결코 따로 놀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이렇게 하고 싶은데, 내 몸이 안따라줘."
"내 몸이 그렇게 했는데, 내 마음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어."
그렇지 않습니다. 몸이 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느낌, 그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표현, 그것이 몸입니다.
몸과 마음을 마치 다른 것처럼 분열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사실, 자신을 몸도 마음도 아닌 제3의 것처럼 믿고 싶은 의도입니다.
이를테면, 마징가Z의 의식이 있고, 또한 마징가Z의 육체가 있는 가운데, 거기에 도킹해서 양자를 다 움직이게 할 호버파일럿을 탄 쇠돌이를 자기라고 간주하고 싶어하는 생각입니다.
고대의 인도적 사유에 근거한 명상이나 영적 수행론 내지 분아(分我)적 구조를 말하는 관점들에서 곧잘 채택하곤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쇠돌이는 참나, 영혼, 관찰자아, 주시자, 메타인지 등의 이름을 갖습니다. 이러한 쇠돌이들이 하는 일은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잘 작동하나 보고 있으며, 몸이 잘 작동하나 보고 있습니다. 오직 그것만을 합니다.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놀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나간 엄마처럼, 늘 근심어리고 긴장된 상태로, 혹시나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눈을 똑바로 뜨고 관찰을 계속합니다. 잠깐이라도 졸려서 한눈을 팔게 되면, 늘 깨어있지 못했던 자기의 모자람을 자책하며, 자기의 못남을 수치스러워하며, 더는 이러한 방심이 없도록 늘 진정한 CCTV가 되기 위해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분명 쇠돌이는 자기가 없으면 마징가Z가 어리석어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징가Z에 대한 관찰을 계속합니다.
이 말은 다시 이렇게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없으면 하나님이 어리석어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감시를 계속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모독합니다.
가장 귀하게 모셔야 할 것을 가장 천하게 대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두려움과, 두려움으로 인해 생겨난 불신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신뢰할 수 없어서 생겨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어서, 자기가 제3의 정체성을 만들어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해, 하나님조차도 다룰 수 있는,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쇠돌이는 결국 자기우상이 됩니다. 구루화가 진행됩니다.
또한 그렇게 제3의 것처럼 자기를 설정해야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습니다. 관찰하기 위해선 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즉, 몸을 관찰하는 이는 몸과의 거리를 둘 수 있고, 마음을 관찰하는 이는 마음과의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리는 안전감을 보장합니다. 특히나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이 거리의 확보는 필연적으로 야기됩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어렵게 느끼는 이가, 즉 하나님이 까딱하면 자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 이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렇게 분열된 거리감 속에서, 하나님이 혹시라도 수틀려서 자신을 아프게 하지나 않을까 하나님에 대한 감시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똑바로 된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 오히려 하나님을 가르치려고까지 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우상화의 활동만을 계속하는 동안, 하나님을 감시하는 시선을 계속 보내는 동안, 정작 하나님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눈치챌 수 없게 됩니다. 자기가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오로지 노크만을 계속하고 있기에, 그 소리에 가려 문의 반대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경우, 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에게 주어진 막중한 과업이 됩니다. 자기가 책임지고 잘 해내야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회복은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며 "괜찮아. 내가 같이 있잖아."라는 말을 당신의 시선으로 전하는 일, 그렇게 우리가 늘 사랑받고 있는 온전한 존재라는 든든한 사실을 그 시선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일, 이것이 바로 회복입니다. 표현 그대로, 우리 자신의 면모를 다시 찾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정신차리고 꾸준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 습관으로 배양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지 않을 때도,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몸과 마음이 아무 노력없이도 이미 스스로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애초 마징가Z와 같은 기계가 아니기에, 쇠돌이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의 책임자인 쇠돌이가 지금 이 자리에 없으면 큰일날 것처럼 구는 것은, 은유되듯이 하나님이 만유(萬有)하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이 말은, 물리적인 거미줄처럼 도처에 이미 깔려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양자도약의 방식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그 순간 그 필요의 부름을 듣고 시공을 넘어 그 자리에 돌연히 출연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입장에서는 늘 부를 때마다 그 자리에 계시기에, 마치 모든 자리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를 들자면 이러합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쇠돌이가 있습니다. 자신이 마징가Z를 건강하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쇠돌이는 마징가Z 안에 탑승해 자기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징가Z에 탑승하면, 그렇게 마징가Z의 주인처럼 행세하려고 하면, 결국 쇠돌이는 다른 기계들과의 끝없는 싸움에 휘말려야 합니다. 그래서 더 두려워지고, 그만큼 마징가Z라는 구조에서 더는 내릴 수 없게 됩니다. 악순환입니다.
싸우고 싸우던 중에 결국 쇠돌이는 우주로까지 나가 블랙홀에 빠지게 됩니다. 사방의 압력이 쇠돌이를 에워쌉니다. 쇠돌이는 갈수록 쫄아듭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심장이 꽉 막힙니다. 두려움의 압력에 더욱 눌리고 눌려 쇠돌이의 움직임이 멎습니다. 쇠돌이는 이제 그가 탄 기계만큼이나 고정된 명사(名詞)가 되었습니다. 분자운동이 멎었습니다. 그래서 차가워졌습니다.
그렇게 쇠돌이는 얼음이 되어 가장 차가운 명왕성에 관짝처럼 버려집니다.
라이카처럼 비좁은 상자에 실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서러운 외우주에 내동댕이쳐집니다.
그래서 쇠돌이는 온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 두려워진 우리는, 끝내 쫄아든 얼음이 된 우리는 온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쫄아든 곳에 얼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온기가 있습니다.
쇠돌이가 쫄아든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순간, 쇠돌이는 얼음을 느끼고, 동시에 온기를 느낍니다.
얼음과 온기의 발견은 동시입니다. 시간차가 없습니다. 순식간입니다.
해빙은 순식간입니다.
쇠돌이는 가장 먼 우주에 홀로 버려진 차가운 조종석 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얼음이 된 자신을 만나러 온 그 하나님의 손길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간절히 찾던 것이 자신을 귀하게 찾아온 사실에 눈물을 흘립니다.
이 손길은 마치 시공을 뛰어넘어 양자도약을 하듯이, 차가운 명왕성에 홀로 버려진 사람을 한순간에 되찾으러 온, 정확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0.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홀로 차가운 기계의 관짝에 갇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가장 따듯한 이 품으로 돌아오는 일은 순식간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부활은 순식간입니다.
버려져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회복은 순식간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한 쇠돌이는 이제 마징가Z를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자신 또한 마징가Z를 유능하게 조종하기 위해 훈련하지 않습니다.
쇠돌이는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낼 하나님의 시선과, 자신을 되찾으러 올 하나님의 작용을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이 몸의 작용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둘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스스로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은유하듯이, 하나님은 스스로 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손길이 닿기도 전에 이 스스로의 작용은 이미 일어나 있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껴 쫄아들 때, 우리의 자세는 자연스럽게 구부정해집니다.
이 구부정한 자세를 마징가Z의 전사답게 당당한 모습으로 피려고 하면, 허리에 무리가 가서 허리가 아파집니다. 그래서 아픈 허리를 또 치유하려고 하면 애씀이 계속됩니다.
여기에서는 다만 구부정해지는 스스로의 작용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쫄았을 때, 몸은 구부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더 많은 면적의 살이 서로 접촉되면서 우리는 온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낄 때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온기를 얻기 위해, 가장 정확하고 신뢰로운 방식으로 스스로는 구부러집니다.
몸이 알아서 합니다. 마음이 알아서 합니다. 스스로가 알아서 합니다.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스스로가 가장 잘 작용합니다. 0.1초도 안되는 순식간에, 삶의 필요에 따라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몸을 다루고 마음을 다루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하나님으로, 즉 몸님과 마음님으로 귀하게 모시는 일입니다.
곧, 스스로를 님으로 귀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우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회복은 언제나 스스로에 의한 회복입니다. 이 스스로의 발견은 양자도약처럼 이루어지는 가장 신속한 현실의 발견이며, 양자역학만큼이나 가장 위대한 사실의 발견입니다.
마지막까지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스스로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스스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