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없는 시대: 웃음의 발견"
지금의 시대는 감동이 없는 시대입니다.
감동이 없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도취입니다. 과잉된 열광과, 과잉된 냉소입니다. 이 열광과 냉소에 도취되는 것은 마치 열탕과 냉탕에 몸을 담그는 일을 반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바로 자극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감동이 없을 때, 우리는 더 강한 자극만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려고 하게 됩니다. 늘 적을 만들고, 갈등을 만들고, 시비를 가려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재미없게 느끼는 이가 정치에 빠지게 되는 그 이유입니다. 정치는 자극적인 드라마입니다.
"어머어머, 저거 봐 저거, 어머 어쩜 저럴 수가 있니!? 쟤가 저러면 안되는데 어쩜 좋아!?"
정치에는 마치 삼국지처럼, 일본의 전국시대 이야기처럼, 은하영웅전설처럼, 언제나 적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대립구도가 있고, 그 구도 속에서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되는 서사가 있습니다. 그 서사에 우리가 자기를 몰입시키면, 마치 무협지를 읽을 때처럼 우리 또한 무협지 속에 참여하고 있는 주인공이 된듯이 자극적으로 경험됩니다.
이와 같이, 가상의 서사를 통해 가상현실을 만들어 사람들을 그에 몰입시키려는 활동을 선전(propaganda)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전은 원래 문예창작활동입니다. 곧, 가짜뉴스 만들기와 같습니다. 때문에 선전의 전문가들은 어떠한 것이 가짜뉴스인지 잘 알아보곤 합니다. 자신들이 누구보다 잘해온 일인 만큼 그 구조와 원리가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할 때는 선한 선전이고, 남들이 할 때는 악한 가짜뉴스라는 식으로, 마치 그 두 활동이 다른 활동인 것처럼 묘사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선전과 가짜뉴스는 동일한 본질의 활동입니다. 동일한 음모론의 드라마입니다. 그 핵심은 이러합니다.
'허구로 타인을 조종하려는 의도의 활동.'
허구는 우리에게 재미를 주는 것 같기에, 우리는 거기에 쉬이 도취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허구가 주는 자극에 몰입한 결과, 우리는 그 담보로 허구의 창작자들에게 조종당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선전이 아무리 선하고 좋은 방향으로의 계몽이라는 대의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조종은 조종입니다. 폭력에 다름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엄마가 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다 알아서 하는 일이니 너는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며, 아이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목소리와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재미없게 느껴질 때는, 우리가 이러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때입니다. 특히나 그 폭력의 구조가 만성적일 때입니다. 학교에만 가면 폭력을 당하는 이에게 학교생활이 재미있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직접적인 가해만이 폭력이 아닙니다. 우리를 조종하려고 하는 의도가 가장 큰 폭력의 의도입니다.
이러한 의도의 주체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폭력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창작한 시나리오 속에서 오히려 자신을 폭력적인 존재들에 맞서 우리를 구하려고 하고 있는 굉장히 선한 존재인 것처럼 허구적으로 착각하기까지 하고 있다면, 이 폭력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나쁜 것들로부터 엄마가 너를 지켜줄거야."라며 아이를 가장 집요하게 통제하고 조종하려고 하는 그 엄마만이 아이에게 유일한 폭력적 존재일 뿐입니다.
융과 같은 심리학자는 이처럼 누군가를 아이처럼 보며 그를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특성을 '부정적 모성'이라고 묘사합니다. 이 부정적 모성은 권력적 남성에게서 주요하게 발현됩니다. 특히나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권력적이지 않은 척 하는 분열된 권력적 남성에게서 이 특성은 두드러집니다.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자신은 폭력적이지 않은 척 하는 분열된 엄마의 모습과 같습니다.
부정적 모성이 부정적인 이유는 표현 그대로 부정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정적 모성에 있어 가장 크게 지향되는 부정성은 바로 죽음입니다. 곧, 아이의 죽음입니다.
부정적 모성은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아이가 죽는 꿈을 꿉니다. 모든 사유가 아이의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수렴됩니다. 그래서 그 만연한 죽음의 징조로부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든 아이를 통제하고 조종하고자 하게 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아이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적 서사를 창작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아이가 죽음으로부터 위협받는 것이 마치 아이의 진짜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꾸는 꿈, 곧 자기가 만든 허구를 아이에게 뒤집어씌운 채, 그 허구를 정당한 근거로 삼아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적 모성의 활동은 선전의 활동과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이러한 부정적 모성의 핵심적인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습니다.
"더 죽으면 안 돼."
그리고 이 목소리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감동없는 시대를 경험하게끔 만드는 주된 이유입니다.
감동이라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음은 삶을 통해 움직입니다. 곧, 우리가 살아야 감동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삶을 향해 있을 때만 감동이라는 것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부정적 모성의 "더 죽으면 안 돼."라는 목소리는, 부정적 모성 자신이 지향되어 있는 바, 오직 죽음에만 경도된 방향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삶을 향한 방향성이 실종됩니다. 마음의 흐름을 잃게 됩니다. 이에 따라, 감동이 사라집니다.
감동을 소통의 기쁨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죽음만을 바라보는 방향성 속에서 위축되지 않은채, 또 통제되고 조종되지 않은채, 서로간에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자원의 순환이 곧 소통입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우리는 정말로 기뻐집니다. 사는 일이 너무나 행복해집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무인도에서 날린 종이비행기를 누군가가 받아서, 다시 우리를 향해 날려준 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비로소 사람에게 발견되고, 사람이 정말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삶을 감동으로 느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더 살고 싶다."
더 살고 싶다, 사는 것이 참 좋다, 라며 이 삶에 대해 감동을 경험한 과거의 선구자들이, 자기도 더 살아 기쁘고, 남들도 더 살아 기쁠 수 있는 현실을 실현하기 위해 전염병에 대한 백신을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삶이 정말로 좋은 것이라는 감동을 자각한 이들에 의해 정말로 인간이 그 소망대로 더 살게 되는, 수명이 확장된 현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허구의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가짜뉴스가 아니라, 진짜 현실이었습니다.
결국 인간 자신의 삶을 더욱 키워간 것은 삶을 향한 방향성과, 그 삶에 대한 감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삶의 감동을 노래하며 '더 살게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선전하며 다만 '더 죽지 않게 하는' 시대입니다.
곧, 삶이 아닌 죽음만을 보게 하는 시대입니다.
물론 '살아간다'와 '죽어간다'는 동일한 사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표현될 때 이것은 서로 다른 현실을 낳습니다.
"더 살고 싶다."
"더 죽으면 안 된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른 현실입니다.
여기에는 감수성의 차이가 작용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감수성이란 삶에 감동할 수 있는 특성입니다. 그래서 삶을 향해 개방된 정도의 차이가 곧 섬세해지거나 둔감해지는 감수성의 차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감수성의 차이는 보다 섬세한 현실과 보다 둔감한 현실의 차이를 낳습니다.
이것을 소망과 당위의 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주제들로 설레는 여름방학과, 해야만 하는 과제들로 가득찬 여름방학의 차이입니다. 더 살고 싶은 소망으로 생생한 현실과, 더 죽으면 안 된다는 당위로 침체된 현실의 그 차이입니다.
이 감수성의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코로나를 페스트처럼 묘사하면서, 그러한 불치병에서 회복된 개인의 사례를 알리는 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글들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더 살게 된 감동의 색채가 흐릿합니다. 오히려 다만 더 죽지 않은 정도의 우울한 무감함의 정조와 비판적 계몽의 의도가 더 지배적입니다. 코로나를 마치 지옥의 불치병처럼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불치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성공적인 이의 보고치고는 너무나 침체되어 있습니다.
암으로부터의 회복과 같은 더욱 거창한 예시까지는 필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날 마신 숙취에서만 해방되어도 눈물을 흘립니다. 웃음을 짓습니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이제는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울고 웃으며, 다시 찾게 된 삶에, 또 한 번 살 수 있게 된 삶에, 더 살게 된 삶에 한없이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 결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 모릅니다.
코로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한 불치병이 아니거나, 아니면 우리가 삶을 정말로 좋은 것으로 바라보며 그 삶에 감동할 줄 아는 감수성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전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전자의 결론을 기각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후자입니다. 감동없는 시대의 영향을 받아 똑같이 감동을 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죽음의 선전만을 하고, 죽음의 음모론만을 보급하며, 그럼으로써 죽음의 가상현실만을 도입하려는 시대와 동일시되어 똑같이 삶을 향한 감수성이 둔감해진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삶을 향한 감수성이 대체 무엇인지는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1997)'와 같은 영화에서도 잘 묘사됩니다. 영화에서는 코로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실제적으로 오직 죽음의 기운만이 감도는 것 같은 강제수용소 안에서도, '더 죽으면 안 된다'가 아니라 '더 살고 싶다'의 살아있는 기쁨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의 현실을 묘사합니다. 곧, 가장 심각한 죽음 속에서도 삶을 통해 웃을 수 있는 인간의 자유로움을 노래합니다.
이것은 비단 영화라는 또 다른 허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2차대전 당시의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실존상담의 한 분파인 의미치료(logotherapy)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의 그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이야기합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들의 특성을 돌아보면, 그들은 죽음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삶을 향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고, 그렇게 '더 죽으면 안 된다'가 아니라 '더 살고 싶다'의 마음으로 살고 있던 이들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나아가 빅터 프랭클은 '더 살고 싶다'의 핵심을 바로 자유라고 말합니다. 삶의 본질이 바로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 모든 강압적 통제와 조종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바라보는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웃음은 자유의 실현 그 자체입니다. 그 모든 죽음의 선전과 음모론의 협박 속에서도 우리가 웃을 수 있을 때, 오히려 그 선전과 협박이 웃음을 유발하는 내용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며, 곧 우리는 정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체 어떠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을 향한 감수성입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삶의 기쁨을 누리며 웃을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삶을 향한 감수성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이 웃음을 잃은 시대입니다. 그러니 자유가 없고, 감동이 없으며, 무엇보다 인간이 없습니다. 입을 꽉 다문 엄중한 표정과, 웃으면 혼날 것 같은 심각한 분위기와, 착하게 잘 통제되는 아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그렇게 웃음을 잃어 인생이 재미없는 아이들끼리 서로 싸우며 자극을 소비합니다. 아이들의 싸움으로 가장 기쁨을 얻는 것은 물론 부정적 모성의 주체입니다. 그러한 아이들에 대해, 자신은 황희정승도 될 수 있고, 솔로몬도 될 수 있고, 성모마리아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이 자기를 중심에 놓고 서로 싸우는 일은, 부정적 모성에게는 대단히 뿌듯한 기쁨의 사건입니다. 싸움으로 죽어가는 모든 아이에게 사랑받는 엄마로서, 곧 죽음을 불사하고 아이들이 자기를 놓고 다투기까지 하는 가장 가치있고 중요한 대상이 된 엄마로서, 부정적 모성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집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향한 감수성입니다.
삶은 모든 웃음이고, 죽음은 하나의 웃음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웃음만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일, 이것을 독재라고 부릅니다. 죽음을 선전함으로써 부정적 모성의 주체가 정말로 하고자 하는 일, 그것은 독재입니다. '더 죽으면 안 된다'의 아름다운 이름 아래 펼쳐지는 독재입니다. 그것이 독재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 또한 그 이름의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아이가 더 죽지 않도록 살리려고 했을 뿐인데, 대체 그게 왜 독재냐? 아니, 그러한 것이 독재라면, 나는 몇 번이라도 독재할 것이다! 아이가 더 죽지 않게 살릴 것이다!"
이것이 독재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아이도 그걸 원하는지 아이에게 물어봤니? 아니, 그 이전에, 네가 아이로 보고 있는 것이 정말 아이가 맞긴 하니?"
마치 당연하게, 양반이 노비를 측은하게 보며 그 노비가 더는 죽지 않도록 자신이 살려야 한다고 말하는 식의 바로 이것이 독재입니다. 이미 그렇게, 앞서 이끌어야 할 고귀한 의무를 가진 자기가 없으면 제대로 못사는 노비처럼 인간을 보고 있는 이 시선이 바로 독재의 시선입니다.
독재하는 부정적 모성이 정말로 이해해야 하는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 없어도 안 죽어. 오히려 너 없어서 안 죽어."
죽음만을 향하게 선전함으로써, 인간의 현실을 사방의 죽음에 에워싸인 아이의 현실처럼 만들고 있는 것은 오직 부정적 모성일 뿐입니다. 즉, 부정적 모성 자신이 바로 죽음을 가득하게 끌어오고 있는 그 원인입니다.
단순한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진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 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말 안 따르니 결국 이렇게 되는 거 봐라. 그 상처 이제 썩어가면서 냄새날 거고, 시꺼먼 고름 터져나올 거고, 그 고름이 네 친구들한테 옮겨가 다들 좀비 되서 네 살 뜯어 먹을 거고, 엄마아빠도 좀비들에게 물려 죽어서 넌 고아 될 거고, 다리 썩어서 그 다리 전기톱으로 잘라내야 될 거고, 그렇게 혼자 네 편 아무도 없는데 외다리로 절뚝대며 좀비들에게 도망다녀야 될 거고, 이게 다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거 해서 그렇게 되는 거야. 엄마가 네 인생 알아서 행복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줄텐데, 왜 하지 말라는 위험한 짓을 하고 있어. 너 그러다 죽어."
다시 한 줄 요약입니다.
"내 말 안 따르면 죽어."
이것은 모든 선전의 한 줄 요약입니다. 모든 부정적 모성의 한 마디 요약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죽음을 우리에게 정말로 가져오고 있는 것은 누구인 것일까요?
자신의 말만 따르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하는 이, 그가 바로 죽음의 신입니다.
지구를 지킨다고 하는 용사가 있어서 지구가 늘 외계인에게 위협받습니다. 용사가 바로 외계인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용사가 없으면 외계인도 없습니다. 지구는 스스로 안전합니다. 이와 같습니다.
"내가 약한 너희를 지켜줄게!"
이 말이 사실은 가장 큰 협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협박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협박의 주체가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하려는 그 죽음의 방향이 아니라, 비로소 협박의 주체의 얼굴을 똑바로 향할 수 있습니다. 누가 대체 우리를 협박하고 있는지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아이의 얼굴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 좋은 대학에 가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엄마 말에 따라 열심히 살았던, 그래서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며 그 자신의 시선을 잡아끌던 독수리오형제와 가면라이더, 후뢰시맨 같은 지구방위대의 이야기를 누릴 수 없었던 아이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렇게 지구방위대에 대한 동경과 선망만을 어린 시절의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몸만 훌륭한 어른이 된 이 아이들은 이제서야, 어벤져스와 같은 히어로물이 대세가 된 이제를 맞아서야, '더는 늦으면 안 돼'라는 마음으로 지구방위대를 향한 오랜 마음을 수줍게 풀어놓고자 합니다. 그 수줍은 조심스러움만큼이나, 대단히 심각한 얼굴과 대단히 엄숙한 표정으로.
이처럼 이 협박의 주체가 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죽음의 신이 들고 있던 낫은 수수깡으로, 부정적 모성의 엄격한 노성은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떼쓰는 응석으로, 지구방위대들의 수트는 베비라 영유아복으로 다시 정확하게 보이게 됩니다.
아직도 이 이야기가 감이 오지 않는다면, 레드후뢰시, 핑크후뢰시 등의 지구방위대의 사진을 찾아, 그 쫄쫄이 전신타이츠를 입은 몸통에,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우리의 인생을 지켜줄 것처럼 보고 있는 그 훌륭한 사람들의 심각하고 엄숙한 얼굴을 오려 붙여보면 됩니다.
그 웃음이 바로 삶입니다.
그 웃음이 바로 삶을 향한 감수성입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동이고, 기쁨이며, 곧 자유입니다.
우리를 아이처럼 보며 그러한 우리에게 웃으면 안 된다고 하는 부정적 모성이, 실은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고 있는 아이입니다.
아이로 인해 웃음이 번집니다. 아이는 '더 살고 싶다'라는 마음이 몸이 된 존재입니다. 더 생생한 삶, 더 살아야 할 삶이 아이의 것입니다. 웃음으로 가득한 삶이 바로 아이의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삶이 아이의 것이듯, 아이는 삶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아이와 같은 인간의 입장은 삶에 대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입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삶 외에 누구도 감히 아이에게 죽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죽음의 이름으로 가하는 협박과, 조종, 통제는 다 허구의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삶이 자신의 것인 아이를 지킵니다. 그렇게 삶에 의해 지켜진 아이가 큰 웃음으로 우리를 지킵니다.
그래서 지구방위대의 유일한 역할은 재롱잔치처럼 웃음의 제공입니다. 중세의 광대의 복장과 오늘날의 어벤져스의 복장은 동일합니다. 그들은 웃음으로 세상을 지키는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감동없는 이 시대의 문제는 명백해집니다. 웃음을 위해 활동해야 할 광대들이, 오히려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웃음 외에 다른 중대한 일을 하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없는 광대, 이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웃음없는 지구방위대, 이것만큼 지구를 피말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도 또 웃습니다.
재미없는 광대들이 펼치는 심각한 연극이 마치 우리 자신의 현실인 것처럼 똑같이 심각하게 보고 있다가, 문득 자신이 그러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그 사실이 너무나 희극적으로 느껴져 우리는 마스크 속에서도 웃습니다.
이 웃음이야말로 방역입니다.
죽음의 선전이 만들어내는 두려운 가상현실이 우리에게 침투하지 못하게끔 하는 존재의 방역입니다.
웃음이 존재를 지키고, 웃음이 존재를 키웁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서까지도 '더 살고 싶다'의 현실로 우리의 존재를 이끌어갑니다. 태어나서, 살 수 있어서 기뻤던 인생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심리학은 삶에 감사하는 감동의 웃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