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는 심리적 죽음이다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길로 가라"

by 깨닫는마음씨



"권태는 영혼의 독약이다."라고 비유적으로 말할 때, 이 말은 성립된다. 권태는 심리적으로 이미 죽은 상태와 같다.


그러나 죽은 줄 모르고, 마치 죽지 않은 것처럼 계속 현재의 죽은 상태를 거부하고 있을 때, 증상은 밀려온다. 일상은 아주 권태로워진다.


죽었다는 것은 흐름이 정지했다는 것이다. 순환이 끊기고, 유출입이 없다. 자기복제뿐이다.


세상에 다 자기만 있어서 지루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이 다 뻔해 보인다. 정체성만 공고해진다.


정체성은 표현 그대로 정체된 것이다. 죽음의 징후다. 특정한 정체성을 고집하고 있을 때 권태가 찾아오는 것은 필연이다.


그런데 이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곧잘 시도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의 이동을 기획하는 일이다. 하나의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 방식을 본캐에서 부캐로 바꾼다거나, 또는 다른 게임에서 캐릭터를 키우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해봤자 권태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게임불감증이다.


그렇기에 더 감동적이고 더 재미있는 척을 해야 한다.


이미 정체되어 멈춘 것을 어떻게든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발전소의 터빈은 가열차게 공회전한다.


성대하게 불을 지피는 원료는 바로 갈등이다.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살아 있는 것만 같다. 그 열기가 자신을 고양시킨다. 소주에 벌겋게 달아오른 혈기처럼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영웅이 다시 깨어난 것이다.


갈등을 통해 영웅을 다시 소환해낸 것이다.


권태에 대한 해결책은 늘상 이 소영웅주의로 귀결된다.


'맞다! 이제야 다시 생각났어! 난, 영웅이었지!'


그런데 이러한 영웅의 면모는 언제나 그 언행이 억지스럽고, 그 색채가 과잉스럽다.


그것은 도취의 전형적인 징후다.


그렇게 대상들 사이에서 어떠한 불쏘시개의 소재라도 잡아냄으로써 끝없이 갈등의 불씨를 지피고, 그 불길 속에서 무슨 불사조처럼 약속된 영웅으로 부활하는 자기도취의 신화에 영영 취하고자 한다.


대단히 지루한 자기복제를 반복한다.


권태로워서 하는 일이며, 그렇게 하고 있기에 더 권태롭게 되는 일이다.


자기복제, 이것이 권태라고 하는 심리적 죽음의 핵심적인 이유다.


무엇을 복제하는가?


영광의 시절이다.


이 영광의 시절을 지속하고 반복하려는 퇴행욕에 의해 권태는 생겨난다.


그 시절이, 초속 5cm로 떨어지는 벚꽃잎과 함께, 쓰르라미 소리에 저물어가는 해바라기밭의 석양과 함께, 덕수궁 돌담길의 낙엽을 밟고 되짚는 첫사랑의 흔적과 함께, 12월의 창가에 입김으로 서린 그리움의 노래와 함께, 모두 하염없이 사라져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권태는 생겨난다.


사랑했던 것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권태는 생겨난다.


이미 죽었으나, 그 죽음을 모르는 척하고 있는 상태의 징후, 그것이 바로 권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권태는, 죽음이 아파서, 다시 죽음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랑이 너무 아팠어서, 다시 사랑하지 않으려 하는 상태와도 같다.


그래서 자기의 껍데기 안에 들어 앉아, 자기복제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게 이렇게 아픈 것이라면 이제 아프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권태에는 실은 애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애도를 가장 가로막는 것이 바로 소영웅주의다. 영웅에 대한 꿈이다. 그것은, 만약 그러한 영웅이었다면 자신이 사랑하던 것을 잃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끝없는 자책의 꿈이다. 후회하고, 또 후회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웅은 만들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웅은 결코 미래를 향해 서있지 않다. 미래를 열어주지 못한다. 영웅은 언제나 과거만을 돌아보고 있다. 자신이 못했던 것만을 반추하며, 마치 불난 집에서 소중한 사진 한 장만이라도 건져보려는 듯이 과거 속에서 작은 교훈이라도 끄집어내보고자 뇌세포를 필사적으로 마찰시키며, 늘 갈등과 번민 속에 자기 자신을 태우고 있다.


영웅이 하는 일은 이처럼 자신을 불태우며, 그 갈등의 불길 속에서 "나는 영웅이다!"라고 공허하게 소리치는 일뿐이다. 때문에 우리 자신의 진정한 면모로서 우리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 상정된 영웅이나, 실제로 영웅에게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영웅이 아니라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최상이다.


애도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복제를 위한 기다림이 아니다. 하드디스크에 담긴 야동이 USB로 옮겨질 때까지 기다리는 그 시간이 아니다.


떠나간 것의 향기가 빈 통인 우리 자신을 가득 채워, 우리 자신이 곱게 숙성될 그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다.


동일한 내용으로 채워지는 모델링이 아니다. 내용은 이미 떠나갔다. 정체성의 재구성이 아니다. 정체된 것은 이미 흘러갔다.


숙성된 빈 통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향기다.


자아의 영웅주의가 촌티를 내며 도취의 감정으로 부산할 때, 이 향기는 다만 그윽하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향기로 남는다.


바로 이 지점이다.


떠나간 것은 향기가 된다.


떠나간 것의 향기로 숙성되어 지금 여기의 향기로 남은 것, 그것은 실은 떠나간 것과 함께 죽은 것이다. 향기로만 남은, 그 안은 빈 통이다.


애도는, 떠나간 것과 함께 우리 자신도 죽었던 그 시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다림이다.


우리가 사랑한 것이 떠났다는 사실은, 진실로 우리도 그 순간 죽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진실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운명의 마지막까지 함께하자는 그 언약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한 것에 대해, 그것을 정말 사랑했음을 마지막까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이 시간을 통해 증거하는 이로 말미암아 사랑은 완성된다.


그래서 그 향기는 사랑의 향기다.


애도는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이 자기죽음의 경지에 끝내 도달한다. 종교적 원리들에서는 자기비움이라고도 말한다. 모든 죽음은 우리 자신의 자기비움에 대한 암시다. 그 자리는 우리가 영웅으로 다시 태어나는 자리가 아니라, 자아라는 영웅이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다.


이처럼 우리는 떠나간 것이 정말로 떠났다는 그 상실을 받아들이는 만큼, 우리의 자아를 기쁘게 잃게 된다.


대상의 상실은 곧 자아의 상실이다.


그리고 자아를 잃은 만큼, 그 자리를 사랑이 대신 채운다.


사랑은 향기처럼 흐른다.


내가, 바로 자아가 죽을 수도 있는 그 길로 물길을 연다.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길이라는 것은, 내가 죽어도 좋은 길이라는 의미다.


그 일을 하다가 우리 자신이 죽어도 좋은 일을 할 때 우리는 행복하다. 거기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도 좋다.


자아가 죽어도 좋다.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이 글이 권태에 대한 글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까마득하게 잊혔다. 권태는 이미 있지도 않다.


영원히 살아숨쉴 사랑이 굽이쳐 흐른다.


잘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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