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할 용기란 무엇인가?

"존재 그 자체의 느낌"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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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실존상담의 대부인 롤로 메이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불안의 의미'를 주제로, 자기의 존재가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현대인의 보편적 문제라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러자 메이의 절친한 선생이자 친우인 실존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존재할 용기(The Courage to Be)』라는 저서를 집필하여 새로운 용기의 개념을 제시하고자 했다.


먼저 틸리히는 두 가지 형태의 용기의 개념을 개괄한다. 첫 번째는 집단에 참여할 용기고, 두 번째는 자신으로 개별화될 용기다. 이를 약간 변주해서, 전자를 세계가 될 용기라고, 그리고 후자를 자아가 될 용기라고 표현해볼 수 있다.


이 두 형태는 마치 대립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것이다.


세계가 자아를 구성하고, 자아가 세계를 구성한다.


세계의 다른 이름이 바로 관계다. 세계는 여러 관계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자아는 이 관계의 내적 반영물이다. 나아가 자아는 자기의 신화적 이야기를 통해 다시 관계의 세계를 확장해나간다.


즉, 세계와 자아는 다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래서 용기의 이 두 형태들을 이야기일 용기라고 통칭할 수도 있다.


그리고 존재할 용기는 이 둘 다가 아닌, 즉 이야기가 아닐 용기다.


그것은 자아가 아니니까 무아(無我)적 용기고, 세계가 아니니까 탈계(脫界)적 용기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기는 가능한 것인가?


일례로 정신분석가인 라캉과 같은 이는 이야기에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없거나 아주 극소수라고 말한다.


이것은 실존의 대립항인 구조를 강조한 라캉답게 그가 왜 반실존적인 인물인가에 대한 그 이유다.


실존적 입장에서는 이야기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성의 차원이 아니라, 그냥 기정 사실이다.


우리의 존재는 이미 사실적인 차원에서 이야기 없이 존재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야기 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이다.


이야기에 대해 우리가 아주 쉬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독재적이라는 사실이다.


세계는 관계고, 관계는 체계다. 고로 이야기는 체계다.


이야기는 체계적 문법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이야기는 자기의 체계가 깨지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러면 이야기의 서사가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수와 영희가 집에 가다가 소나기를 만났는데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물레방앗간에서 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던 다크엘프의 펜던트를 발견하고 그 무고한 자의 죽음에 격분한 철수가 펜던트를 높이 들고 영희와 손을 모아 천지신명 앞에 장엄하게 맹세하기를, 빼빼로 먹고 먹고 야야호 야호, 길동아 뭐해, 글 쓰는 거 재미없다, 롤 하러 가자. ㅋㅋㅋㅋ ㄴ;ㅡ;주;ㅏ루ㅏㅜㄴ라 ㄵ2ㅐ 야우워


우아에 어 우아 아아 오와이워 예 에에 이 오우아 우 와 오 이야아아아아아아

헙 후우우


흐으음

엉엉엉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깨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마음은 존재현상이라 언제나 이야기의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자아의 밖으로, 세계, 관계, 체계의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지금 여기의 실시간적 삶의 자리로 나가고 싶어한다. 그 자리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어한다.


이처럼 모든 존재하는 생명은 독재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어한다. 그가 가진 원래의 본성인바 자신의 자유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바로 느낌으로.


이야기의 독재에 의해 억압되어 뒤로 밀려나 은폐되어도, 결국에는 존재현상인 마음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반드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그 자유의 몸짓, 그것이 바로 느낌이다.


느낌은 존재의 자기보고와도 같다.


이야기가 자기의 서사를 따르지 않으면 너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때, 느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격하게 존재하고 싶다는 존재의 요동을 알린다.


그리고 이 느낌의 작용이 그대로 '존재할 용기'가 대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말해준다.


틸리히는 '존재할 용기'를, 허락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허락됨을 허락해보고자 하는 용기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이야기에 의해 존재가 조건적으로 부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미 무조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사실로서 받아들여보고자 하는 용기라고 다시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를 내적으로 구성하는 이야기인 자아와, 우리를 외적으로 구성하는 이야기인 세계[관계]에 의존하지 않아도,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 벌써 존재하고 있다. 우리 존재의 정당성을 저당잡힌 채 이야기들이 우리를 좌지우지하는 독재를 더는 허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자유다.


우리가 매순간 느끼고 있는 느낌이 이를 증거한다.


느낌은 그 자체로 '존재할 용기'가 실현되고 있는 상태다.


우리의 존재가 부정될수록, 표면적으로는 미세할지라도 내적인 느낌은 더 강렬하게 일어난다.


용기의 기운이 우리를 가득 채운다.


그 기운을 따라 존재해도 된다. 존재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느낄 때조차, 바로 그것도 느낌이다. 어떠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 느낌을 따라, 그 용기의 기운을 따라 우리는 허락되리니, 그 허락됨을 이제 허락해보아도 된다.


그렇게 느껴도 된다는 것은, 그렇게 존재해도 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우리의 존재는 바로 그렇게 어떠한 거부당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제자리를 찾는다.


존재 그 자체의 느낌이 그것을 허락한다.






이아립 - 너무 너무 바빠요
하고 있던 모든 걸
잠시 놓아버려요
정지한 시간속에
너의 기분을 느껴요
그냥 느껴요
그냥 느껴요
그냥 느껴요
그냥 느끼는 그것만으로도
날 찾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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