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말아야 할 것"
그대여, 오늘도 거절당한 그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대의 진심은 언제나 찬밥 신세다. 그대의 최선은 언제나 아무도 함께 먹으려 하지 않는 신김치뿐인 도시락 신세다. 그대의 소망은 언제나 주정뱅이의 오줌세례에 찢겨나가는 전봇대의 전단지 신세다.
그래서 그대는 모든 것을 버리려 한다.
거절의 이유가 된 그대의 모든 모습을 버리려 한다.
그리고 거절당하지 않고 사랑받을 수 있는 새로운 모습을 꿈꾼다.
이성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그대의 못생긴 모습을 버리고 성형외과에 찾아가고, 상사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그대의 자신감없는 모습을 버리고 스피치학원에 찾아가며, 부모에게 이해를 받기 위해 그대의 의존적인 모습을 버리고 심리상담센터에 찾아간다.
버려야만 새로운 것이 온다.
그대는 옳다. 지극히 옳다.
그러나 그대가 원하던 새로운 모습을 얻은 뒤에도, 그대는 여전히 거절당한다. 그대는 여전히 찬밥 신세고, 신김치 신세며, 전단지 신세다. 옳은 그대가 거절당하니 더 죽을 맛이다.
그대가 대체 무엇을 더 버려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더 이 누추한 본판을 갈아 엎어야 그대는 햇살 아래 당당한 모습으로 설 수 있는 것일까.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다. 방사선이라도 쐬서 DNA 개조라도 이루고 싶다. 뿌리 끝까지 그대 자신을 부정해서라도 완벽한 새로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꼭 그러고 싶다.
그런데 되지 않는다.
썩어빠진 이 정신과, 비루한 이 몸뚱이는, 무엇을 해보아도 계속 그대의 발목을 잡아끈다.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에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자연스레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그대는 이제 다시 태어날 길을 찾고자 한다.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다는 수상한 목소리들에 귀가 열리기 시작한다. 영성, 마음공부, 깨달음, 요가, 타로, 호흡수련, 명상, 인도여행, 산티아고 순례길, 채식, 뉴에이지, 세도나, 마음챙김, 점성술, 채널링, 에너지힐링, 사주, 가족세우기, 꿈분석 등등, 목록은 끝이 없다.
다행이다.
아직도 할 것들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 있다. 아직도 희망은 이렇게나 많이 남아 있다. 아직도 버릴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 있다.
그대 자신을 비워야 한다. 더 많이 덜어내고, 더 가득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면, 그때서야 그대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거절당하지 않고자 하는 이 마음조차도 썩어빠진 옛 정신과 비루한 옛 몸뚱이의 소산이다. 이 한 마음만 내려놓을 수 있으면, 꿈은 멀지 않다. 아니 그러한 꿈조차도 내려놓아야 한다. 그대는 사랑받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그대는 그저 그러한 옛 정신과 옛 몸뚱이에 흔들리지 않는 여여함일 뿐이다. 다 그렇고 그런 것인게지. 모든 것이 다 집착이 만들어내는 허무한 망상일 뿐, 다 그렇고 그런 것일 뿐인게다.
그대는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그대는 이제야 좀 평온한 것 같다.
그대는 이제야, 좀 덜 아픈 것 같다.
그대여, 그대는 이제야 정말로 안 것이다.
그대는 너무나 아팠던 것이다. 거절당해서 너무나 아팠던 것이다.
때문에 그대는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아서, 그대가 아픔을 느낀 부위들을 버려왔던 것이다. 심장을 잘라내고, 폐를 잘라내고, 간을 잘라내고, 손발을 잘라내고, 눈코입을 잘라내고, 혀를 잘라내면서, 그대는 아픔을 느끼는 부위들을 버려왔던 것이다. 그대의 몸을, 그대 자신을 버려온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제 아무 아픔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왜 그렇게 괴로웠던지, 그대는 윤동주 시인만큼이나 스스로를 속일 수 없이 정직하고 섬세했다. 그대의 머리는 그대가 아프지 않다고, 이제는 버틸 만하다고 줄기차게 최면을 걸고 있었지만, 그대의 몸은 휘청거렸다. 아파서 떨고 있었다. 아픔만큼 울고 있었다.
그대는 더는 모른 체 할 수 없다.
"나를 못본 체 하지 마. 나는 여기에 있어."
그대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그대의 몸이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그대 자신(自身)이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그대가 버릴래야, 결코 버릴 수 없는 바로 그것, 그대가 그대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증거, 그대 자신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다른 이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그대가 가장 부정하고, 무시하고, 파괴하려 했던 그대의 몸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생째로 찢어발겨져 피고름이 채 아물지도 못한 상처투성이의 그대 자신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대가 그대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기 위해서, 얼마나 희박한 확률의 기적이 필요했는지 그대는 알지 못한다.
붓다는 그대를 오온의 집성물이라고 말한다. 그대의 존재가 허무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우주를 이루는 모든 것이 모여 그대를 만들었다는 의미다. 그대가 이 우주의 유일한 목적이자 결과라는 의미다.
그대의 몸을 이루는 성분은 우주에 떠도는 먼지들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우주의 모든 곳에서 먼지들이 모여와 그렇게 그대라는 사람을 이룬 것이다. 그대는 모든 우주가 보낸 소망이다.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말 못할, 말도 안되는 기적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린다고 해도 그대가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이 바로 그대의 귀한 몸이다.
그대는 몸이 있기에 느낄 수 있다. 그대의 머리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어도, 그대의 몸은 언제나 반드시 느끼고 있다. 느낀다는 것은 그대가 몸이 있다는 증거다. 그대가 자신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버려진다고 해도 그대에게서 결코 버려질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그대의 소중한 느낌이다.
거절당한 일이 그대에게 그토록 아팠던 이유는, 거절당할 때면 그대는 늘 자신이 버려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아픔은 버림받음의 아픔이었다.
그러나 그대가 느끼고 있는 한, 그대의 몸은 결코 버려지지 않는다. 그대 자신은 결코 버려지지 않는다.
그대는 이것을 몰랐기에, 아픈 자신을 버리려고만 해왔다. 아픈 느낌을 없애려고만 해왔다. 이처럼 버리면 안될 것을 버리려 하니, 더 버림받은 것만 같았다.
그대여, 아픈 자신은 버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서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두가 거절하더라도, 그대만은 그대 자신을 느껴서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붙잡힌 그대 자신의 표현 속에는, 바로 그대의 느낌 속에는, 소망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그대를 만든 이 우주 전체의 소망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그 소망은 거절당하기 전 그대가 살고 싶었던 현실로, 그리고 거절당한 뒤 그대가 영영 잃었다고 생각한 그 현실로, 그대를 다시금 데려가준다. 그대가 느끼고 있는 것에 대한 진실된 표현이 그 현실로 그대를 다시금 초대해준다. 느낌이 그 현실로 그대를 다시금 돌이켜준다.
그대가 거절된 그 행위를 통해, 얼마나 행복하고 싶었는지, 얼마나 따스함을 느끼고 싶었는지, 얼마나 예쁨받고 싶었는지, 얼마나 잘하고 싶었는지, 얼마나 친밀하고 싶었는지를, 그대의 몸은 전부 다 기억한다. 그 느낌을 전부 다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그대는 그 온유한 느낌 속에서, 거절당함으로써 잃었다고 생각한 그대 자신을 다시 찾는다. 그대가 얼마나 갸륵하고 어여쁜 존재인지를 다시 기억하게 된다. 그대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새삼 감격하게 된다. 그대는 바로 그러한 그대 자신이다.
버려야만 새로운 것이 온다.
그대는 옳다. 지극히 옳다.
진실로 버려야 할 것은 거절당한 그대, 진실로 챙겨야 할 것은 느끼는 그대 자신이다.
그대 자신이야말로 늘 새롭게 오는 것의 이름이다. 반가워서 더 귀한 이름이다.
그대의 몸은 귀하고, 그대의 느낌은 소중하다.
이 사실을 사는 그대는 나날이 새로워져만 가는 그대 자신이 늘 감동스럽다. 그 어떤 거절로도 빛바랠 수 없는 귀하디 귀한 그대 자신의 향기가 그대를 거절한 이들의 가슴마저도 적신다. 그러한 그윽한 소망을 모아, 우주는 그대를 이 세상에 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