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40

"약함과 아픔"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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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은 '약함'의 문제를 다루는 일인가, '아픔'의 문제를 다루는 일인가?


이 질문방식 자체가 커다란 착각을 해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약.해.서. 아.파.졌.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약함과 아픔은 혼동되며, 문제는 단지 '문제를 위한 문제'의 양상으로 쓸데없이 복잡해진다.


약함과 아픔을 스스로 구분할 수만 있어도 우리는 사실 심리상담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 정도로 핵심적인 것이다. 상담은 바로 이 둘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려는 활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분명하다. 어.떠.한. 상.담.접.근.도. 인.간.을. 약.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이것은 가장 거부되는 인간관이다. 인간은 약한 것이 아니라, 잠시 아플 수 있을 뿐이다. 근.본.적.으.로.는. 건.강.한. 존.재.가. 인.간.이.다. 이는 실증적으로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은 365일 내내 아픈 사람인가? 아니면 아플 때만 아픈 사람인가?


몸의 문제로 이해하면 분명해진다.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사.실. 다. 몸.의. 문.제.다. 만약 당신이 근본적으로 아픈 사람이었다면, 당신은 아쉽게도 이 글을 읽고 있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당신의 아픔은 이미 사라졌거나, 또는 이제 곧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다. 모든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마치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아픔이 있는 것처럼, 혹은 자신이 무엇인가 근본적인 마음의 아픔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이는 사실 아픔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약.함.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적인 차원에서는 놀.랍.게.도. 우.리.는. 약.할. 수.가. 없.는. 존.재.다. 거의 늘 강한 존재다. 강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건.강.함.이.다. 신체의 결손이 있거나 특정 부위가 잘 기능하지 않는 이도, 그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대사활동을 잘 하고 있다면 그는 건강한 존재며, 곧 강한 존재다. 오히려 그러한 장애로 인해 그의 강한 생물학적 면모는 더 두드러진다. 또는 보다 장기적인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이도, 어쩌면 그로 인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 있는 이도, 그가 그 한계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한 그는 사실적으로 강한 존재다.


우리의 몸은 줄기차게 강하다. 약하지 않다. 그.러.나. 아.플. 수.는. 있.다. 아무리 그 힘이 강한 이라도 언제든 병에 걸릴 수 있다. 또는 아무리 건강한 이라도 책상 모서리에 발가락을 찧으면 아프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아픔을 부당하다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픔은 언제라도 자신의 '준비태세'와는 상관없이 찾아올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아픔은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아.픔.은. 아.픔.이.지. 잘.못.의. 문.제.가. 아.니.다. 아픔을 잘못처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아픔에 대한 의미부여'다. 아픔이 무의미하기에, 그 무의미성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인위적으로 만드는 의미부여다. 아픔이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렇게 출현한다.


그러나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부여에는 언제나 기만의 의지가 담겨있다. 아픔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의미부여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으.면.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굴절된 생각의 표현이다.


누가 이런 생각을 하는가? 이를테면 마치 일진이나 조폭에게 시달린 것 같은 지배적 폭력의 경험을 한 이들이 이 생각을 품는다. 이들은 폭력을 경험해 아파하면서도, "내가 잘못했으니 아픈 거지."라며 아픔이라고 하는 것을 '정당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맞아도 아프지 않을 수 있는 '인내력'을 키우려고 하거나, 또는 아픔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지배력'을 키우려고 한다.


이들은 자기가 충분히 강했으면 아프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약한 것이 이들에게는 잘못이며, 그것이 아픔의 이유다. 이러한 방식으로, 약.함.은. 잘.못.이. 되.어.버.린.다. '아픈 존재'란 '약한 존재'며, 곧 '잘못된 존재'다. 이 믿음은 이제 이들이 더욱더 아픔을 무시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거나 티를 내면 안된다. 그러면 자신은 '잘못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부정당한다. 이것은 이들에게 아픔 자체보다 더 두려운 것이다.


부모에게 착취된 이들이 이러한 두려움에 매우 자주 노출된다. 육체적 폭력만이 아니다. 부모가 그 눈빛과, 분위기와, 언술로 이루는 정신적 폭력 앞에서 이들은 최대한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 한다. 아.픔.을. 호.소.하.면. 무.엇.인.가. 자.신.이. 죄.를. 짓.는. 것.만. 같.다. '올바른 부모' 앞에서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잘못된 존재'로 타락하는 것만 같다.


물론 이들에게도 아픔은 싫은 것이다. 없을수록 무조건 좋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아픔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궁리해낸 전략이 전술한 것처럼 '인내력'과 '지배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이들에게는 바로 이 인내하며 지배할 수 있는 '지성적 능력'이 곧 '강함'이다. 생.물.학.적. 건.강.함.이. 아.니.라. 지.성.적. 능.력.이. 강.함.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일그러진 현실이다.


'피해자의 가해자화'는 왜 생겨나는가? 아픔은 왜 반복되어 세습되는가? 또는 아픔의 도미노 현상은 왜 일어나는가? 바로 이 '굴절된 강함'의 추구로 인해 생겨난다.


아주 쉽게 이해해볼 수 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떨어진 우박에 맞아 아픔을 경험한 이가 있다. 그는 자신이 약했기 때문에 아픔을 경험하게 된 것이라고 자책한다. 한심하다. 더는 이러한 '잘못된 존재'로 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우박이 내릴 때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그 세례를 견뎌낸다. 나아가서는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다부진 눈빛으로 하늘을 노려본다. 기상을 생각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 주.술.적. 행.위.를. 인.간.에.게. 시.도.한.다. 인간을 인내하며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일이, 약해서 잘못된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일로는 아픔은 극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픔은 더욱 커진다. 왜 그럴까? 이것은 이제 서로가 그 지배권을 다투는 '왕좌의 게임'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상대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가스라이팅이다. '왕좌의 게임'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것이다. 상.대.를. 약.화.시.킨. 그. 결.과. 자.신.이. 강.해.진. 척.하.기. 위.해. 이.루.는. 게.임.이.다.


가장 효율적으로 이 게임의 승자가 되는 방식은 상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약해도 괜찮아. 약한 너도 온전한 존재야."


상대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약한 마음을 알아준 이의 앞에서 작은 포유류처럼 유순해질 때 지배권은 양도된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자.신.이. 약.한. 것.을. 돌.보.는. 입.장.에. 빠.르.게. 위.치.하.는. 것.이 이 게임의 모범적인 승리공식이다.


남녀관계에서 자기보다 약해보이는 상대만을 연애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잠정적인 가스라이터들이다. 정확하게는 이들은 약.하.게. 생.각.되.는. 자.기.보.다.도. 더. 약.한. 상.대.를 선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보다 더 약한 이를 돌보는 위치에 서면 자신은 이제 '잘못된 존재'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한쪽은 늘 헌신하는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다른 한쪽은 무엇을 해도 늘 잘못하는 무능력자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관계의 바깥쪽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무능력자를 비난한다. 이로 인해 무능력자는 '잘못된 존재'로서 더욱 공고화된다. 관람객들은 또한 천사가 너무 가엾다며 빨리 이 관계를 정리하라고도 말한다. 천사는 조금은 슬픈 미소를 띠며 "내가 없으면 저 사람 어디까지 떨어질지 몰라."라고 말한다. 모두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무능력자에 대한 비난을 심화한다.


혹시 당신에 대한 묘사로 들렸다면 미안하다. 갑자기 칼침을 맞는 일은 언제나 아프다. 그런데 당신도 미안해해야 한다. 당신이 '강함'을 얻기 위해 한없이 상대를 '잘못된 존재'로 만들어 약화시킨 일을 미안해해야 한다.


이것은 병적인 행위라고 니체는 분명하게 말한다. 약한 것을 찾아 다니며 약한 것을 떠받드는 행위, 이것은 건강한 것이 아니다. 아주 일그러진 정신병이다. 니체는 이러한 풍조를 '데카당스'라고 부르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이 데카당스를 대변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약하게 보이는' 주인공에게 여러 여성들이 필사적으로 헌신하는 내용을 다룬다. 물론 주인공 또한 그 여성들을 불쌍하고 약한 존재로 보며, 결국 이 구도는 인간전반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다 이렇게 병신입니다."


인간을 전부 병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하는 아주 집요한 '지배에의 의지'를 우리는 이 소설에서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왕좌의 게임'의 귀결은 언제나 이처럼 모든 인간의 약체화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약하게 보고 있는 그 관찰자 자신만이 왕좌에 오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병적인 세상이며, 곧 아픈 세상이다.


우리가 서로를 약하게 만들어 서로를 지배하려는 이 게임을 하고 있을 때는 아픔만이 만연해진다. 그.러.나. 아.픔.은. 아.픔.으.로. 보.이.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약.함.으.로. 보.이.게. 된.다. 그러니 "약한 것에게 상냥해지자."라는 게임의 규칙을 통해 다시 한 번 '지배'가 시도되며, 그것은 더 '약해진다.' 즉, 더 아파진다.


"약한 것에게 상냥해지자."라는 말은 결국 "아픔을 지배하자."라는 의미와 같다. 아픔을 지배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더 아파질 수밖에 없다.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카뮈가 『페스트』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병은 순도 100%의 아픔의 문제이지, 그것은 잘못의 문제가 아니고, 또 약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카뮈는 인간의 아픔을 굴절시키는 그 모든 시도를 절단했다. 그리고 아픔에 대해 정말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무엇인지를 묘사해내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이 없는 세계 속에서 성자로 사는 일은 가능한가?"


소설의 주인공인 의사 리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제시된 인물이다. 아픔은 부당한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부조리함 속에서 리외는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가? 그.는. 상.냥.하.다.기.보.다.는. 정.확.했.다. 그는 모든 상냥한 환상을 철폐하고 정확한 사실만을 보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 대답이다. 할 수 있는 것만을 하고 있는 이, 그는 강한 이다. 그.의. 건.강.함.은. 신.성.하.다. 신이 없어서 부조리한 아픔이 만연한 세계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자기초극'이라는 지점에서 분명 니체와 카뮈는 만나는데, 그 둘은 각기 비유하자면 '부처'와 '보살'의 입장으로 다시 길을 달리한다. (니체가 훨씬 더 종교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자기초극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둘을 통해 선명하게 이해해볼 수 있다.


아.픔.에. 정.직.하.면. 자.기.초.극.적.인. 것.이.다.


'정직성'은 '정확성'이다. 정확하다는 것은 굴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픔은 정확하게 아픔인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아픔을 약함으로, 또 잘못으로 보고자 하는 의도는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부정직한 의도'를 내포한다.


상담자는 정직성으로 활동하는 이다. 상.냥.함.으.로. 지.배.하.려. 하.지. 않.는. 이.가. 바.로. 상.담.자.다. 물론 상담자의 '정확성'은 결과적으로 상냥하게 경험될 수는 있다. 퉁명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어도 가장 정확하게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수술의 결과로 완치된 환자에게 누구보다 친절한 이로 보이게 되는 것과 같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영화인 '굿 윌 헌팅'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맷 데이먼에게 건넨 그 유명한 대사를 떠올려보자.


"네 잘못이 아니야."


이것은 정확성을 위한 발화였다. 맷 데이먼이 '잘못'과 '아픔'의 경계를 정확하게 구분하게끔 이루어진 의도였다.


맷 데이먼은 자신이 '잘못된 존재'라고 착각했기에, 그 잘못의 이유가 된 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위악적으로 강한 척하려는 행위를 반복했다. 자신의 '지성적 능력'으로 모든 것 위에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왕좌'를 획득하고자 했다. 로빈 윌리엄스는 그의 그러한 행위가 착각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정확하게 전한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약했던 적이 없다. 우리는 약해서 잘못된 존재였던 적이 없다. 존재는 강하고, 우리는 그 존재다. 우리가 약해서 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강.하.다. 다만 우리가 아무리 강해도, 우리는 아플 수 있다. 우리가 아픈 적은 있었다.


정확하게 다시 이해해보자.


당.신.이. 경.험.했.던. 그.것.은. 아.픔.이.었.다.


당신은 아팠던 것이지, 약했던 것이 아니고, 잘못했던 것이 아니다.


당신은 왜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아픔이 있다고 말하는가? 당신이 아픔을 보지 않고, 약함의 잘못을 만들어내 그것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무력함'과 '죄'에 집착하고 있어서 아픔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할 때 아마도 당신은 화가 날 것이다. 약한 자신의 모습에, 아직도 잘못을 씻을 수 없는 자신의 한심함에 화가 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재들을 수집하고, 자신을 용서해줄 누군가를 찾아 다니기도 할 것이다. 어디에도 없다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을 '마음의 온전함'이라고 부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화.는. 당.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나.는. 것.인. 까.닭.이.다.


당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면 화는 사라진다. 그 임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약한 것이 많아서, 당신이 지켜줘야 할 것이 많아서 여전히 화가 난다고 말하지 마라. 그저 당신이 아픈 것이다. 당신이 아파서 세상의 모든 것이 '약해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약체화시키지 마라. 아픔은 더 커지며, 해소되기에 요원한 것이 된다.


당신이 이미 충분히 강하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이해하면, 세상도 충분히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겨날까?


이.제. 세.상.이. 당.신.을. 도.울. 수. 있.게. 된.다.


아파하는 당신에게 이제 강한 세상이 손길을 내밀 수 있다. 세상이 당신의 편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아픔은 그 호소만큼 세상에게 응답되어 더 정확한 회복의 기로에 놓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기도 한데, 이것이 사실 우리의 희망이다. 그리고 이 희망은 아주 잘 작동해왔다. 인간이 당신의 생각보다는 훨씬 더 강했기에, 우리는 지금껏 성공적으로 지구 위에서 생존해오고 있다.


강.한. 것.이. 선.한. 것.이.다. 이 말을 정치적 권력의 시선으로 굴절되게 듣지 않는다면,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은 안다. 인간이 충분히 강하다는 사실은 인간이 충분히 선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니체는 정말 속상했다. 인간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자꾸만 왜곡한 뒤 오히려 약한 것에 집착하여 스스로 병들어가는 상황에 대해 아주 답답해했다. 표현 그대로, 약해서 아파진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병적인 게임의 양식이다. '가상의 병'이다.


이러한 '가상의 병'을 소비하는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우리는 왜 아프다고 하는 대신에 약하다고 말하고 싶어하는가?


아.픔.이.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아프다고 하면 죽음이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찾아올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다고 하지 않음으로써 일부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그것을 약함의 문제로, 잘못의 문제로, 그러니까 인내하고 지배해야 하는 문제로 심화시켜 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무엇일까? 건.강.한. 이.만.이. 아.픔.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아픔을 느끼는 이는 정확하게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단 그의 통각은 잘 작동한다. 그의 뇌도 잘 작동한다. 그것들이 불건강한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아.프.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아픔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의 건강함을 근거로 경험된다. 이렇게 또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강.해.서. 아.파.진.다.


여러 차원에서 읽을 수 있는 말이지만, 당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당신이 접수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말이다. 당신은 아픔이 남긴 그 어떤 상처보다도 강하고, 아픔 그 자체보다도 언제나 강하다. 그것들이 당신을 죽일 수 없다. 아.픔.은. 오.히.려. 아.픔.이. 당.신.을. 죽.일. 수. 없.다.는. 바.로. 그. 표.현.이.다. 아픔을 정직하게 호소하는 이는 지금 현재 죽음으로부터 가장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소한 당신은 약해서 죽어야 할 이가 아니다. 당.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당.신.이. 오.히.려. 강.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은 핵심적이다. 착취와 학대가 이루어지던 그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일진은, 또 부모는 왜 당신에게 폭력을 가했는가?


그.들.이. 형.편.없.이. 약.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그들 역시도 그들 자신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 약하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다른 이를 대신 약하게 만들기 위한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한다. 그 지배력이 더 많은 힘을 가하는 폭력이 된 이유도 명백하다.


당.신.이. 만.만.치.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착각하던 것처럼 당신이 약한 존재가 아니라 엄청나게 강한 존재였기 때문에, 당신을 지배하려던 이들은 폭력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당신을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폭력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끝내 제압되지 않았다. 폭력의 역사는 실은 당신의 성공적인 생존의 역사이기도 하다. 상담자들이 폭력을 경험한 내담자를 '피해자'라고 하지 않고 '생존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더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기 때문이다.


약한 이들만이 폭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약함'은 곧잘 '악함'이 되곤 한다. 니체는 정확하게 이 사실을 통찰했다. 한나 아렌트는 또 어떠했는가? 평범한 이들이 악마가 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여기에서 '평범함'이라는 것은 '잘못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남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약한 이들의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강해지기 위해, 곧 '제대로 된 존재'가 되기 위해, 언제나 타인을 대신 약하게 하려는 이 악의 일을 집행한다.


이것이 '약함'에 경도되어 있는 일종의 망상상태인 까닭에, 이러한 이들에게는 자신이 상대에게 넘기려 하는 그것이 '약함'이 아닌 '아픔'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를 아프게 만들면서도, 이들은 자신이 강해졌다는 그 '가상신체'의 감각에만 도취된다.


이처럼, 자.신.의. 아.픔.을. 무.시.하.는. 이.는. 상.대.의. 아.픔.도. 무.시.하.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아픔을 가장 무시하는 방식은 '아픔'의 문제를 '약함'의 문제로 굴절시키는 이 일이다. 그리고는 진정으로 강해져야 한다며 권위에 집착하고, 가만히 있어도 마음을 아는 놀라운 '초능력' 같은 것에 집착하며, 이러한 집착으로 동일한 집착의 세력들을 불러모아 그것을 재물로 환산한다. 전부 다 '강한 힘'에 대한 굴절된 강박이 낳는 일이다.


실존상담에서 '힘'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할 때, 이 힘은 '도구적 힘'이 아니라 '존재의 힘'이다. 권위력, 능력, 재력, 육체력, 무력, 지력 등의 것이 아니다. 니체에게 이 '존재의 힘'은 '생명력'이다. 생명에게 원래 내재된 스스로의 힘이지, 대상적 소재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도구적 힘'이 아니다.


물론 인간은 '도구적 힘'을 사용해 자연에 성공적으로 적응해왔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인간이 약했기 때문에 도구를 활용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인간의 뇌가 비약적으로 강했기에 인간은 '도구적 힘'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자신이 약하기에 다른 인간에게 이 '도구적 힘'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도는 더욱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과. 동.등.한. 크.기.로. 강.한. 것.을 대상화하여 착취하려는 의도는 언제나 끝없는 싸움만을 부를 뿐이다.


"나는 엄마보다 약했잖아. 나에게 대체 왜 그랬어?!"


이러한 말은 보통 엄.마.가. 자.기.보.다. 약.해.보.일. 때. 발화된다. 이것은 정말로 '왕좌의 게임'이다. 자신이 힘을 갖겠다고, 이제 왕위를 내놓으라고 하는, 끝없는 복수극이다.


만약 이 복수극의 게임을 의도적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라면, 찾아가야 할 곳은 상담소가 아니라 복싱체육관이나 이종격투기 훈련소다. 상.담.은. 아.픔.만.을. 거.듭. 양.산.하.는. 게.임.을. 통.째.로. 끝.내.고.자. 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상담은 필연적으로 '내 아픔'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다루게 된다. 통.시.적.으.로.도. 또. 공.시.적.으.로.도. 하.나.의. 아.픔.은. 언.제.나. 모.든. 아.픔.이.다.


그러니 진심으로 '아픔'의 문제는 '약함'의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시공간의 모두가 약해서 아픔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강하기에 아픔은 호소된다.


며칠 내내 밖에서 울고 있는 새끼고양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 존재는 지금 약해서 울고 있는가, 아파서 울고 있는가? 그 울음소리가 콘크리트 벽을 넘어 청자의 귀에 닿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강한 파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존재가 지금 강하게 울리고 있으니, 청자가 그 울림에 공명되어 같이 울린다. 청자의 존재가 요동친다. 그 요동만큼 청자는 자신의 힘을 어떤 때보다도 강하게 느낀다.


이것은 착한 사마리아인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존재를 영접하게 되는 그 역사에 대한 묘사다. 강.한. 것.이. 강.한. 것.을. 부.른.다. 두 배가 아니다. 제곱으로 강해진다. 이것을 우리는 '사랑의 힘'이라고 부를 것이다. 사랑은 강하다. 아픔이 강한 것이기에 그에 응답하는 사랑도 강한 것이다.


그리고 보라. 그 사랑이 이제 당신을 찾아왔다. 영겁의 시간처럼 며칠 내내 울고 있던 당신 앞에 서있다. 당.신.의. 아.픔.은. 반.드.시. 응.답.된.다. 당신의 아픔이 당신의 강함의 표현이라는 사실에 당신이 정확할 때, 그 응답 또한 정직하다. 우리는 이 건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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