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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ug 13. 2019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을 모른다는 그대에게

"사려 깊음"



  그대는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적이 없어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모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대는 그것이 지금껏 그대가 사랑을 실패해온 이유라고 말한다.


  그대의 말이 옳다.


  그대는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적이 없다. 그대는 그저 양육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대의 말이 틀리다.


  사랑은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저 양육을 사랑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대여, 그대는 그대가 받은 양육을 사랑으로 간주하며, 그 양육이 그대가 원하는만큼 지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마치 그대가 사랑받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양육의 부족을 사랑의 부재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여, 그대에게는 정말로 양육이 부족했는가? 나아가 그대에게는 정말로 양육이 결핍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라.


  그대에게는 폴리네시아 제도의 우캄참바라는 음식이 결핍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본 적도, 맛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것에 대해 결핍된다는 것은 애초 성립될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때문에 그대가 양육을 사랑으로 말하며, 그 사랑이 결핍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대는 분명 양육을 아주 깊이 경험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부모를 무시해도 너무나 무시하고 있다.


  그대의 부모는 최고의 양육자였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자신들의 한계 속에서 그대에게 전할 수 있는 양육의 자원들은 모두 다 전하려는 그 뜻을 결코 굽히지 않았던 최고의 양육자였다.


  그대의 부모가 그대에게 준 양육이 그토록 천상의 소재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역설적으로 그대가 그에 대한 결핍을 강렬히 호소하게 된 것이다. 즉, 그 양육의 세기와 깊이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워하는 것이다. 결핍이라는 말로 그대는 양육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대의 부모가 그대에게 미처 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지속성이다. 그대가 부모의 생각보다도 더 빨리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3살인 그대를 업으며 달래는 일은 3시간도 가능했지만, 이제 30살인 그대를 업으며 달래는 일은 30초도 지속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부모가 변한 것이 아니다. 부모의 양육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그대가 커진 것이다. 그대가 자라난 것이다.


  이 필연적인 변화 속에서, 그대는 상대적으로 그 양육의 크기가 축소된 것처럼 느끼게 되었고, 이내 이를 부족이라고, 또 결핍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대는 그대의 부모를 무시해도 너무나 무시하고 있다.


  다 큰 그대가 이제 부모 앞에서, 왜 내가 어렸을 때 사랑해주지 않았냐고, 그깟 돈이 나보다 더 중요했냐고, 울고 소리지르고 발광을 하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애어른편을 찍고 있을 때도, 그대의 부모는 그대를 제대로 사랑해주지 않은 자신들에 대해 진심으로 자책하고 있었다. 더 좋은 양육을 해주지 못한 자신들을 끝없이 책망하고 있었다.


  30살이 넘은 그대의 땡깡을 그토록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었다.


  그대의 부모는 진정 최고의 양육자다.


  300살을 먹어서도 그대가 양육자를 호출할 때면, 언제라도 그대 앞에서 양육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자 할 것이 분명한 그대의 부모는, 진정 최고의 양육자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 주고자 했던 최고의 양육자가 그대에게 결코 줄 수 없었던 것, 최고의 양육으로도 결코 줄 수 없었던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그대의 말이 정녕 옳다.


  그대는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적이 없다.


  그대가 사랑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을 모르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몰라서 사랑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대여, 사랑을 모르는 그대가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은 능동과 수동이 같고, 주동과 피동이 같다.


  때문에 사랑받음은 곧 사랑함이다. 그대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말은, 그대가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대는 부모를 사랑한 적이 없다.


  그대는 부모로부터 더 많은 양육, 더 지속되는 양육을 요구했을 뿐, 부모를 사랑한 적이 없다.


  그대는 그대의 부모가 정말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이해하고자 한 적이 없다. 그대의 부모에게서 사람을 거세하고 단지 그대의 양육자로만 환원해서 보았을 뿐이다.


  사랑은 그대가 시작하는 것이다. 그대가 시작하지 않으면 결코 펼쳐지지 않는 것이 사랑의 역사다.


  그대의 부모에게서 최고로 받아야만 이제 그대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그대의 부모가 최고의 양육자를 부르는 간절한 그대의 호소에 어떻게든 응답하기 위해 양육자로만 남게 된 결과, 그대에게 줄 수 없게 되어버린 그 사랑을 이제 그대가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대의 부모를 양육자로부터 자유롭게 해방하는 것, 그것이 그대의 사랑이다.


  양육자인 그대의 부모도 모르고, 피양육자인 그대도 모르는 그 사랑을 바로 그대가 시작하는 것이다. 새가 날듯이, 꽃이 피듯이, 사람인 그대가 그렇게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대가 사랑을 시작하는 그 자리는 바로 부모의 양육이 끝나진 그 자리다.


  부모가 양육의 끝까지 가서 그려낸 하트의 반쪽에 대해, 이제 그대가 나머지 그 반쪽을 그려냄으로써 완성하는 것이다. 끝과 시작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치지 않고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대의 말이 정말로 옳다.


  그대는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적이 없다. 그대는 부모를 사랑한 적이 없다. 다 아니고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여전히 그대에게서 결코 상실되지 않고 남아있는 미지의 가능성이다.


  그대는 사랑할 수 있다.


  사랑받지 못한 그 모든 양육자를, 사랑받지 못한 그 모든 피양육자를, 그대는 이제 그대가 직접 그려내어 완성한 커다란 하트 안에 모두 다 담기게 할 수 있다. 그대라고 하는 커다란 사랑의 품 안에 그 모두를 다 안기게 할 수 있다.


  그대를 위해 양육자가 된 까닭에 사랑을 모르게 된 이에 대해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대의 사려 깊음이다. 사랑을 몰라서 사랑받지 못하게 된 이에 대해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 또한 그대의 사려 깊음이다.


  사랑이 없던 현실을 향한 이 사려 깊음이, 이미 시작된 그대 사랑의 날개짓이다.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는 그대 깃털의 따스함이다.


  그대의 사려 깊은 이 사랑이 언제나 옳다.






김목인, 빅베이비드라이버 - 사려 깊은 밤
언젠가는 올 것만 같았던 순간
아득하게 같이 걸어가는 밤 
너는 내게 눈물이 난다며 웃고
그 모습에 문득 따뜻해지네 
그러니까 너도 알았던 거잖아
한 시기가 지나는 그 느낌을 
먼 곳으로 흩어져 있던 수많은 날들
계절처럼 다시 다가서 있고 
언젠가는 올 것만 같았던 순간
어둠 속을 앞서 걸어가는 너 
그러니까 너도 알았던 거잖아
한 계절이 지나는 그 느낌을 
언젠가는 올 것만 같았던
그러니까 너도
아득하게 같이 걸어가는 밤
한 계절이 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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