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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ug 16. 2019

밤의 문이 열린다(2018)

듣는다는 것의 의미



  문(聞)은 문(門)이다.


  들어야 열린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여는 것일까?


  기억을 듣는다. 지나간 삶의 자취를 듣는다. 그럼으로써 의미를 연다. 그 당시에는 도무지 알 수 없던 삶의 의미를 연다.


  삶은 그 자체가 의미다. 때문에 삶을 잃고 유령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삶의 의미를 잃은 존재에 대한 은유다.


  그렇다면 유령이 드러내는 삶에 대한 미련 또한 이 삶의 의미에 대한 미련이라고 할 수 있다. 유령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채 갑자기 끝나버린 삶에 대해 그 의미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의미있는 존재로 살았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은 것이다.


  지나간 삶을 들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삶에 대한 앎은 이처럼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다.


  그래서 앎을 위해 불교에서 활용하는 봄(觀)의 방법론은 사실 듣는 일에 더 가깝다. 시각이기보다는 청각이다.


  여기에서 관(觀)은 또한 관(關)이다. 보는 일은 관계맺는 일이다.


  때문에 문(聞)은 관(關)이다. 들음으로써 관계맺게 된다. 그리고 관계맺음으로써, 우리는 그 관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동일한 관계의 구조가 역할만 바뀌어서 반복된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끝없이 상처만을 양산한다. 상처가 아파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힌다. 상대를 죽이면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망상한다. 그러나 남는 것은 전부 다 상처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이들뿐이며, 그들 모두는 죽는다. 모두가 그렇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채 삶을 잃고 유령이 된다.


  밤의 문은 그들 모두에게 닫혀 있다. 그들은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듣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 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지시한다. 듣는 자가 없는 이 현실의 비극을 묘사한다. 그래서 유령들처럼 우리에게도 미래의 문은 닫혀 있다. 하나의 경계에 갇혀 폐쇄된 생태계 속에서는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하다. 썩은 늪의 냄새다.


  폐쇄에서 벗어나려면 경계 밖을 보아야 한다. 들어야 한다. 곧, 경계 밖에 있는 타자를 보고, 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타자와 관계맺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타자와의 관계를 디딤돌로 삼아 이 관계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은 간절함을 가진 유령이, 듣는 자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듣는 자는 타자를 들음으로써, 타자와 관계맺게 되고, 결국 그 관계의 양상이 타자의 것이 아닌, 자신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딸을 죽이려는 아버지가 있었고, 아버지를 죽이려는 딸이 있었다. 언제나 관계의 구조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던 살인의 양상이다. 그러나 듣는 자의 출현으로 인해,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절규하는 하나의 울음소리를 함께 듣게 된다. 그 울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죽이지 마세요. 제발 살고 싶어요.'


  서로가 서로에게서 들어야 했던 그 목소리며, 서로가 서로에게서 보아야 했던 그 얼굴이다.


  사람의 목소리며, 사람의 얼굴이다.


  듣는 자는 이제 그 모든 죽음을 끊어내는 가장 신성한 선언을 발화한다.


  "이 세상에 죽어야 될 사람은 없어."


  이 말이 들림으로써, 딸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는 결코 죽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서 딸을 다시 기억하고,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딸은 결코 죽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다시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이 결코 죽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서 밤의 거리에 떠오른다. 그 삶의 기억이 생생하다. 보고, 듣고, 관계맺는다. 그래서 열린다. 밤의 문이 열린다. 사람의 문이 열린다. 삶의 문이 열린다.


  삶을 들어서 삶의 문이 열린다. 삶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이것이 바로 삶의 의미였다.


  삶은 그 자체가 의미다. 우리가 실은 얼마나 이 삶을 살고 싶어했는지가 바로 그 의미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지난 삶은 모두가 다 이 살고 싶다는 소망의 자취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살고자 했던 흔적들이다. 죽어야 될 자는 정녕 없다. 오직 살고 싶었던 자들뿐이다. 그렇게 삶을 사랑했던 자들뿐이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이 삶을 사랑했는지를 다시 기억하는 일, 이것이 바로 듣는다는 것의 의미다.


  실존신학자인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듣는 것이다."


  삶에 대한 사랑을 잠시 망각해서, 우리는 의미를 잃고, 삶을 잃어, 유령이 된다. 그래서 유령의 구원은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바로, 듣는 일로만 가능하다.


  들어서 다시 삶을 연다. 열리게 한다. 활짝 열린 문은 우리 모두의 입장을 허용하는 문이다. 이처럼 듣는 자의 출현이 모든 유령의 역사를 멈춘다. 다시 살아 있게 한다. 다시 살고 싶게 한다. 참 섬세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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