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데이트 #2

"이것은 스토리가 아니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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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한 손엔 피묻은 야구배트, 다른 한 손엔 펩시콜라를 들고 멸망한 세상에서 좀비들과 싸우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체모를 적의 위협으로부터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안전한 땅을 찾아 나선 모험담도 아니다.


굳이 장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아니다. 그러한 시대에 살아남은 마지막 순수를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아마도 이 글의 화자인 내가 풍기는 느낌은 신카이 마코토와 홍상수 사이의 그 어디쯤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빛에도 술에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매력적인 주인공이 아니다. 글을 읽는 이들이 나의 다음 여정이 궁금해서, 또 숨겨진 나의 과거사가 하나둘 드러남에 따라 더해가는 인간적인 캐릭터성에 매료되어, 계속 글을 읽게 만드는 요인이 아니다.


나는 매력적인 이야기꾼도 아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효과적인 구성에 따라 나열하여 자연스럽게 독자들이 흡입될 수 있게 하는 재주는 없다.


물론 시시한 인생의 고백으로 쓰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런 나도 인간이라며, 보잘 것 없지만 작고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탐닉적으로 밝히는 인스타 문학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시시한 이야기들을 이렇게 사소설 주인공의 독백처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이것이 어떤 스토리가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스토리, 그건 당신과는 상관없다.


세계는 이미 끝났고, 우리는 이미 끝에서부터 시작했다.


나는 정말로 시작부터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다. 스토리는 끝났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부터다.


이것은 망해버린 세계에서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하나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당신과 나의 세기말 데이트는 스토리가 끝난 바로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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