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된 자리로 돌아가라"
부모와 사별한 이는 무엇을 하는가?
돈을 벌려 한다.
학창시절 집단따돌림을 당한 이는 무엇을 하는가?
돈을 벌려 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이는 무엇을 하는가?
돈을 벌려 한다.
어떠한 일을 하는 데 있어 정당한 자격을 갖지 못한 이는 무엇을 하는가?
돈을 벌려 한다.
회사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는, 연인을 다른 이에게 뺏긴 이는, 배우자와 이혼한 이는 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돈을 벌려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던 이도 돈을 벌려 하고, 자기의 깨달음이 남들의 깨달음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이도 돈을 벌려 하며, 타인과의 논쟁에서 진 이도 돈을 벌려 한다.
이들은 분주하다.
그러나 그대들에게 말하건대, 돈을 벌기 위해 이들은 분주하지 않다.
자기 자신을 만회하려고 숨이 가쁘고 분주하다.
자기 자신을 다시 찾고 싶어서 힘겨운 경주꾼들이다.
오늘날의 시대에 돈은 무적이다. 모든 것을 우회할 수 있는 지름길처럼도 간주된다. 그러니 돈이 많은 만큼 가치있는 자신이 빨리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말은 절반만 옳다.
돈으로는 가치있어질 수 있어도, 결코 자신만은 될 수 없다.
물론 돈이 많으면 자신감이 생기고 돈이 없으면 자신감도 없어지는 경험적 현실 속에서 우리는 돈이 자신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인식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러한 이를 볼 때, 그는 단지 돈이 많은 사람이든가, 또는 돈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돈이 많으면 유익한 인물로, 돈이 없으면 유익하지 않은 인물로 그 도구적 가치가 간단하게 평가될 뿐이다.
이렇게 얻은 실체는 몰개성이다.
몰개성이란 말과 자신이란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대들은 이미 알고 있다. 현대사회의 화폐경제는 그 손길이 뻗치는 모든 것을 몰개성화시킨다. 사람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교성을 흘려댄다.
자신이 누구인지 상대가 누구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다 조건적으로 동일한 반응이 예정된 자동반사 마네킹들일 뿐이다.
반응이 예상될수록 구조는 안정된다. 안정된 구조에 이바지하며, 타자를 효과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도구적 자원을 보유한 상태, 이것이 바로 가치있는 삶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들었는가?
가치있는 삶을 살다간 무수한 영혼들 그 전부가 단말마와 함께 토해내던 한숨 속에 담겨있던 비탄의 소리를.
"아, 내 삶에는 어찌 이리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단 말인가?! 그 모든 것이 무(無)였다!"
정오의 태양이 그대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간곡히 전하고 싶어하던 그 외침을 나는 들었다.
가치있는 삶을 살아간 그 모두가 우울증이었노라고.
우울증은 허무주의가 낳은 자식이다.
허무주의는 신성한 매춘부처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커다란 품, 가치없는 당신도 이 품에 안겨 쉴 수 있지요."
자신을 가장 가치없다고 느끼는 이가, 가치없는 다른 이들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이 가장 가치있어지고자 할 때 허무주의는 태동한다.
이 허무주의의 골짜기에 세간의 모든 요란과 소동이 굴러 들어와 우울증은 잉태된다.
우울증은 그 시작부터 저주받은 자신의 운명을 만회하고자 어떻게든 어미의 골짜기를 벗어나기 위해 기어이 분주하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협곡은 끝나지 않는다. 결국에는 지치고, 쓰러져, 인간은 죽는다. 무(無)다.
그대들 중의 누군가가 이 아이의 죽음을 목격하였는가?
누군가는 이 인간의 서러운 삶에도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노라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일도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기도하지 않고, 기억한다.
아무런 가치없던 하나의 삶이 짙은 발자국처럼 대지에 새기고 있던 그 의미를.
의미, 그것은 기억하는 것이며,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서둘지 않으나 묵직하게 돌아간다.
아이가 흩뿌린 눈물을 따라 우리는 돌아간다.
메마른 골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이 마냥 순순하게 피어나있는 꽃길을 따라 우리는 길을 되밟는다.
의미는 눈물이 피운 꽃이다.
가치있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강퍅함과 성마름의 고집에 생기를 잃은 죽음의 땅이 허무주의다. 허무주의를 터해 자라난 우울증은 그래서 그 시작부터 무가치한 운명 속에 놓여 있다.
허무주의 위에 세워진 현대의 인간의 무가치함은 이미 정해져 있다.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우울증은 가치가 없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울증은 가치가 없는 자신도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를 물으며, 의미를 향해 간절히 발버둥치고, 또 의미에 대해 잠정적으로 좌절해 생겨난 현상이다. 그것은 오직 의미를 위한 궁구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묻고자 한다.
그대들의 눈물은 어느 아픔의 때에 흩뿌려져 싹을 틔워야 했던가?
그대들이 속절없이 몸으로 울 수밖에 없던 그 땅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돌아가라. 돌아가라.
그 자리를 되밟아라.
미로 속에서 분주한 이들은 자신이 헤매게 된 그 분기의 시작점으로 돌아오지 않고자 더욱 미로를 헤매다 죽는다. "앞으로, 앞으로."만을 외치며 스파르타의 병사들처럼 진격하는 이들은 가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다. 돌아가는 일은 후퇴나 패배가 아니나, 깃발은 그렇게 말한다. 깃발은 깃발을 들고 있는 이들의 피로 물들어야 승리의 깃발이 되는 까닭이다.
그대들에게 나는 분명하게 전하고자 한다.
모든 가치의 깃발은 반드시 쓰러지도록 만들어졌다. 사람들의 피가 흥건한 대지 위로 쓰러져야만 그것은 비로소 피로 물들 수 있어서다. 그래서 모든 깃발은 언제나 기초가 없는 부실공사 위에 세워진다.
그대들이여, 분주한 모든 것을 살펴보라.
분주한 모든 것에는 기초가 없다.
기초가 없으니 따라가려고, 만회하려고, 잘 하는 척하려고 더욱 분주해진다. 자신을 기만하는 일은 원래 가장 분주한 활동이다.
돌아간다. 돌아간다.
그대들은 기초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로 돌아간다.
많은 척, 강한 척, 있는 척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눈물이 시작된 그 자리에서 눈물로 기초를 정성스레 키운다.
혹시 그대들은 이제 기억하고 있는가?
대지에 떨어진 그대들의 눈물은 반드시 마중물이라는 것을.
들었다. 들었다.
나는 분명하게 들었도다.
대지가 흔들리며 용트림하는 소리를.
대지의 가장 깊은 곳에 품어져있던 태초의 물이 지금 그대들의 눈에서와 같이 장막을 열어젖히고 뿜어져 나오고자 자신을 격렬히 뒤트는 그 소리를.
춤추듯이 터져나와 불식간에 범람한다.
허무주의의 골짜기는 더는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맑고 깊은 생명의 강물이라고 우리는 기억한다.
이것은 위대한 물줄기의 가장 개성적인 지류이며, 그대들이 기초부터 온몸으로 길어낸 바로 그대들 자신이다.
더는 어두운 골짜기를 홀로 달리고 있지 않을 아이의 웃음처럼 맑고 깊다.
그대들이 살아가는 그 의미가 무척이나 맑고 깊게 목을 적신다.
쩌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