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의식을 치우는 일"
피해자 의식은 초월적 기제로 자신의 아픔을 회피하고자 하는 '영적우회(spiritual bypass)'를 낳는 주 요인이다.
가장 피해자 의식이 큰 이들이 반드시 화하게 되는 것은, 피해를 입은 약자를 돌보고 알아주는 정의의 구원자의 모습이다.
이것은 정말로 '화'하는 모습이다. 화로 가득 차있다. 그래서 늘 화에 치인다.
피해자 의식이 강한 이들이 구원자가 되는 이유 또한 이 커다란 화의 문제와 관련된다. 화에 계속 치여 힘들기에 이들은 화를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한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구원자 활동이다. 약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화를 안전하게 소비할 수 있다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실상 화의 세력만 더욱 강해지게 될 뿐이다. 화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증대된다.
결.국.에.는. 구.원.자.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분.노.를. 쏟.아.붓.게. 되.는. 현.실.이. 출.현.한.다.
그는 사실 온 우주를 향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인데, 이 이해는 중요하다.
그.는. 이.미.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의. 생.각.대.로. 심.판.하.려.는. 복.수.자.다.
자기가 대체 무엇을 들고 있는지를 알아야 그것을 다룰 수 있다.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고 있는 피해자 의식 속에서는 늘 화의 크기가 은폐된다. 화가 가장 은폐되는 방식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기를 피해자에 대한 구원자로 상정하고 있을 때다.
이럴 때는 일시적으로 화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자기의 정체성을 피해자가 아닌 구원자로 교체했기 때문에 잠시간 인식의 전환으로 인해 생겨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욱 큰 화의 은폐다.
'피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구원자'는 그저 동일한 피해자 의식이다. 이 세상에서 피해를 입은 약자만이 그 시야에 들어온다. 동병상련이거나 자기가 구해야 할 이들만 더욱 많이 포착된다. 그러한 만큼 더 많이 화가 난다. 자기는 피해자에서 벗어난 구원자이기에 이제 화가 없는 것처럼 은폐할수록 화는 더욱 증대한다. 복수의 히어로들(avengers)은 늘 불지옥에서 산다.
자신이 현재 이러한 복수자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화의 크기가 세상 전부를 심판할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이 화의 문제는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다.
"나는 억울하게 피해를 받아 화가 났다."
이것이 아니다.
"나는 저것을 없애려고 화가 났다."
이것이다.
그러면 정말로 무엇을 없애고 싶었는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바.로. 약.한. 자.신.이.다.
약한 자신이 꼴보기 싫다. 강한 힘이 있었으면 당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자신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약한 것들이 다 혐오스럽다. 대홍수라도 일으켜 약한 것들은 다 멸종시키고 싶다. 복수자들은 이러한 '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바로 피해자 의식이다.
약한 자신을 없애기 위해 쓰이는 최고의 전략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이제 약한 것들을 알아주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약한 자신은 없어지고, 오히려 약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힘이 있는 온전한 자신이 생겨나는 것만 같다.
니체는 이것을 '약자의 도덕'이라고 부른다.
약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미명으로 실은 약한 자신을 없애기 위해 '착한 스승'의 연기는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화가 많이 나있으며, 그 화에 늘 치여 사는 이, 그가 바로 착한 스승이다. 깨달은 척하는 영적 우회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약한 것은 온전한가?
이 질문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는 강함과 약함이라는 '힘의 프레임'을 설정한다. 존재하는 것들을 다 그 프레임으로만 본다.
인간에게는 강함도 있고 약함도 있으며 그것들이 다 온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이는, 자신이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곧, 자신이 결코 약한 것만은 되지 않고자 기를 쓰는 것이다.
"저도 여러분들과 똑같이 약한 사람입니다."라며 정직한 고백의 연기를 하는 이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렇게 고백하면 동일하게 힘의 프레임에서 자기가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는 약한 것을 무척이나 혐오하기에 필사적이다.
이 세상에서 약한 것이라는 것을 자기가 만들어내놓고는, 그것을 극도로 혐오하며, 나아가 자신이 혐오하는 것을 오히려 가장 소중히 지키고 있는 척을 하느라 그는 아무쪼록 많이 복잡하고 뒤틀려있다.
피해자 의식이 이처럼 우리의 삶을 굴절시킨다.
피해자 의식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화를 계속 내고 있으면 그 열로 인해 우리의 삶이 굴절된다.
우리가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는 일을 관둘 때, 우리는 이 분노를 멈출 수 있는 진짜 힘을 얻게 된다.
인간이 가진, 이 우주에서 가장 신성한 진짜 힘은 무엇인가?
아.픔.을. 이.해.하.는. 힘.이.다.
우리는 약한 것이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약함'과 '아픔' 사이에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힘이 센 자라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힘을 행사하는 만큼 자신이 아프게 될 가능성 또한 증대한다.
자신이 강한 힘이 없어서 고통받았다는 착각이 피해자 의식을 만들어낸다.
강함과 약함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봄으로써, 아픔을 아픔으로 보게 되지 못할 때 피해자 의식은 만들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아픔에 필요한 것은 '피해자 의식'이 아니라 '이해자 의식'이다.
아픔에 대한 이해자가 출현할 때만, 아픔은 치유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야 한다.
이.미. 아.픔.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아.픔.의. 치.유.다.
우리의 몸이 넘어져 생긴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것과 같다. 이미 과거의 그 상처는 없다. 아픔도 없다.
우.리.는. 대.견.하.게. 잘. 생.존.해.냈.다.
그러나 피해자 의식은 '약자'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그것을 고통과 연합시킨 뒤, 이미 없는 고통이라는 소재를 계속해서 붙잡고 끊임없이 소환해낸다.
힘.이.라.는. 것.의. 마.력.에. 취.해.서. 생.겨.나.는. 일.이.다.
심판의 복수자들은 아파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당한 형태로 경험한 그 힘의 맛에 취해, 자신이 그 힘을 쓸 수 있게 내놓으라고 분노한다.
자신을 전능하고 힘센 신으로 대접하라고 분노하는 것과도 같다.
일진에게 맞은 이들이 이제는 자신에게도 강력한 일진의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라고 세상을 향해 분노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이들은 자신처럼 일진에게 맞은 이들을 모아 그들의 약함을 위로하고 그들 역시도 강해질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하면서 결국 '착한 일진'의 권위를 획득하곤 한다. 물론 '착한 일진'은 '착한 스승'의 다른 이름이며, 이것은 피해자 의식이 최종적으로 공고화된 모습이다. 완벽하게 막다른 길이다.
이처럼 분노하는 신의 힘에 중독되어 있을 때 삶은 막힌다.
아픔의 이해자로서의 인간의 진짜 힘이 우리에게서 실종되는 까닭이다.
이.해.는. 흐.르.게. 하.는. 것.이.다.
흐.르.는. 것.이. 곧. 치.유.다.
치유를 막고 있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 의식이다. 그것을 치우면, 이해가 흐르며, 삶은 스스로 치유한다.
이것은 분명 가장 어려운 지점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한번 해보고 싶은 것이다.
아픔을 아픔으로만 우리는 이제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더는 인간이 아프지 않기를 우리가 진실되게 바라고 있는 까닭이다.
그게 지금 우리가 올바로 쓰고 있는 우리 자신의 진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