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심리학 #3

"과장된 메타인지"

by 깨닫는마음씨




'메타(meta)'라는 말이 붙으면 요즘에는 거의 사기성을 띠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메타버스, 메타내러티브, 메타플랫폼 등등, 이 이상한 것들 중에 최고로 과장되어 신격화된 소재는 바로 메타인지입니다.


메타인지를 단순하게 말하면 그냥 '생각에 대한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그 프로세스에 대한 생각입니다. 반성적(reflective) 생각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수학문제를 풀다가 그 풀이의 과정을 점검하거나, AI가 학습을 해나가는 가운데 학습작용이 일어나는 그 문법 자체를 검토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메타인지의 쓰임새는 자기객관화입니다. 마치 자기를 외부에서 들여다보듯이 거리를 두고 초월적 관찰자와 같은 입장에서 관찰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현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자기객관화의 작업은 분명 유용합니다. 축구를 할 때 단지 골만 넣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새처럼 그라운드 전체를 내려다보는 심상으로 자기의 포지셔닝을 객관화함으로써 패스 연결이 수월하고 골을 넣기에 적합한 장소로 이동해가는 일은 유익합니다.


그리고 그뿐입니다.


그러나 사이비심리학의 분야에서는 이 메타인지가 대단히 신적인 그 무엇으로 묘사되는 일이 빈번합니다.


메타인지적 상태를 경험한 이가 자기를 깨달은 존재라고 믿는 경우도 허다하며, 또 그러한 상태를 경험함으로써 이제는 자기가 이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그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작가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소위 말해, 메타인지는 '모든 것을 알아주는 강력한 권위'의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인물이 되고 싶어하던 이가 이 메타인지라는 소재를 상기한 방식으로 매우 자주 남용하게 됩니다.


메타인지를 실용적인 용법으로 가장 쉽게 묘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알아주는 일'


이것은 자기객관화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더 많이 드러나는 의미로는 자기위로가 됩니다.


성인용품점에서 산 자위도구를 신으로 모시는 모습을 우리는 쉬이 떠올리기가 힘듭니다. 너무나 이상한 일이라서입니다.


그러나 메타인지에 대해서는 바로 그렇게 합니다.


자위도구로서의 메타인지는 왠지 모르게 신적인 소재가 되어 우리에게서 심히 예찬되는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대체 왜죠?


자기가 자기를 대상으로 삼아 관찰해서 그 정보를 획득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메타인지적 상태를 경험한 이들은 거의 반드시 자기가 인생스승이라도 된 상태로 이행되곤 합니다.


헬스를 하는 이들에게서도 자연스럽게 이 메타인지는 발달합니다. 운동을 하며 현재 근육이 올바르게 쓰이고 있는지 등에 대해 이들은 늘 자기의 몸을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몸을 알아주는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몸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되었다고 가정할 수는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공통적 구조를 갖고 있으니,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다른 이의 몸이 발달하도록 도울 수 있는 안내의 활동도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메타인지를 발달시킨 이들은 꼭 사람들에게 자기가 더 높은 인생의 권위를 갖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스승이 못되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어떻게든 스승으로 대접받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열심히 쓰며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근대가 남긴 부채입니다.


메타인지는 근대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성분으로 말한 '이성' 그 자체의 순수한 기능입니다. 이성이 다른 요소들과 변별되어 이성일 수 있는 것은 이 메타인지의 기능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프로세스를 의심하는 가운데, 의심하고 있는 이 현재의 프로세스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 이성의 기능을 인간의 중심으로 선언한 데카르트에서부터 메타인지의 가치는 예찬되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이성은 인간에게서 가장 권위있는 소재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가장 관찰하는 자가 가장 권위를 얻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관찰이라는 행위는 주체와 객체라는 구도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객체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객체에게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입장이 바로 주체입니다. 근대에는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이성은 언제나 고고한 초월적 작가와 같이 세간에 영향받지 않으며 표표하게 관찰의 행위를 수행하고, 그럼으로써 보편적 정보를 파악해 지혜의 빛을 내리는 신성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가정되었습니다.


즉, 근대에는 과거의 신을 대신한 이름이 바로 이성이었습니다.


메타인지가 신적인 소재로 인식되는 것은 이처럼 근대의 잔재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관찰하는 주체가 되어 정보를 파악하려는 앎의 방식으로 살다가 인류는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맞았습니다. 이 인류사에 있어 손꼽힐 대참사가 바로 '이딴 식'으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류는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이 문을 연 뒤, 이제 근대의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현대철학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앎에서 삶으로, 또 정신에서 몸으로, 주체에서 타자로, 정말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묘사하기 위해 정직한 이들은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심리학은 현대의 중요한 학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프로이트가 최초의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프로이트를 심리학의 선구자로 보는 이유는 그의 심리학이 이 한 문장의 요약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적) 이성 좆까."


비공식적으로는 니체가 먼저 이 심리학적 선언을 발화했습니다. 그는 프로이트와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에게 이성적 '앎'이 아닌 생리학적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열정적으로 전했습니다.


하이데거가 '존재'라는 개념을 '세계'와 엮고 '시간'이라는 요소를 갖고 들어온 이유도 결국 '삶'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선각자들은 공통적으로 주체라고 하는 독립적 관찰자의 위상을 무너트리기 위해 활약했습니다. 즉, 주체에게 담보되어 있다고 가정된 '앎의 권위'를 해체하려는 일이 이들의 주된 작업이었습니다.


이들이 옳았다는 것은 오늘의 시대가 증명합니다. 아니 오늘날이 되어서야 이들이 정말로 옳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메타인지? 그런 것은 이제 AI가 더 잘 하는 것입니다.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도 아니고, 그렇기에 다른 모든 것들과 인간을 변별시켜주는 핵심적 성분이 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나는 메타인지를 통해 놀라운 자기객관화를 했다!"


자기가 AI라고 뽐내려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시대에는 이제 매우 촌스러운 일입니다.


메타인지를 통한 자기객관화, 즉 자기가 자기를 알아주는 일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러한 자기를 사람들 앞에 스승처럼 입지화하려는 일은, AI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묘사하겠지만, 오늘날 AI의 발달은 반가운 일입니다. 사이비들이 마치 마법과 같은 소재로 주장하는 것들이 실은 AI에게 더 적합하며 유용한 소재로 드러날 수 있게 된 까닭입니다. 때문에 AI의 발달로 인해 가장 빠르게 그 영토를 잃게 될 이들은 분명 사이비들입니다.


사이비는 근대의 유령과도 같습니다. 자신들이 최신의 얘기인 것처럼 위장하나, 그 실체는 그저 철지난 얘기일 뿐이며, 그렇기에 철없는 얘기일 뿐입니다.


AI로 말미암아 '삶'이라는 것은, 특히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탐구들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만큼 '삶'이라고 하는 주제는 더욱더 중요하게 우리에게 부각되었습니다.


이 '삶'이라고 하는 주제의 핵심은 '대체불가능성'이며, 이는 곧 '다름'의 문제를 시사합니다.


메타인지를 통해 자기가 아무리 자기를 알아주는 기능에 익숙해진다고 해서, 그러한 이가 다른 누군가에 대한 인생스승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이로써 분명해집니다.


각자의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는 근대에서처럼 모든 것을 관찰해서 얻게 된 마법과도 같은 특별한 '앎'을 보편적으로 적용해 자신과 다른 타자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망상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이비심리학의 주체들이 자주 하는 말들인 "성공한 저만 따라 하면 당신도 성공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마음을 알게 되는 우수한 관찰자가 되면 인생이 바뀝니다." "모든 마음을 알아주면 내 존재가 온전해집니다." 등은 전부 다 근대적 망상의 표현으로 명백히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마음' 등과 같은 표현은 실용적으로 불가능한 표현입니다. 마음은 삶의 현상을 뜻하며, 결국 '모든 마음'이라고 쓰려면 '모든 삶'을 의미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살지도 않은 타자의 삶에 대해 '모든 삶'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가 그 삶을 알아준다느니, 그 삶을 온전하게 한다느니, 그 삶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구역을 마련한다느니 등과 같은 표현은 자기를 신으로 생각하는 대단히 건방진 주체만이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자신이 살지도 않은 삶에 대해 앎의 권위를 행사하려는 일은 무식한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똑똑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무식한 사이비들이 이러한 폭력을 자주 자행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되는 소재가 역시 메타인지입니다.


자기에게는 놀라운 자기객관화의 경험이 있고 메타인지의 능력이 증대되었기에 이제는 사심을 넣지 않고 투명하고 순수하게 남의 삶을 다 알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하는 일에 이 메타인지라는 단어는 자주 악용됩니다.


착각 중의 대착각입니다.


삶에서 어떤 것을 그나마 알 수 있으려면 사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말입니다.


자기객관화라는 앎이 유일하게 가능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자기에 대한 사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 대한 사심이 가득했기에 '관찰' 이전에 그 자리에는 '참여'가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가득 참여하고 있었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을 알려면 거기에 몸을 던져 참여해야 합니다. 시간을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철학 및 심리학은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를 강조합니다. 앎이 아니라 삶을 함께 섞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상담은 어떤 활동인가요?


내담자와 삶의 시간을 함께 나누는 활동입니다. 이것 외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상담의 실패는 상담자의 실패라고도 말합니다.


정말로 상담이 필요한 내담자는 용기를 내어 자기를 던져 참여하기 위해 상담실에 왔는데, 상담자는 자기를 던져 참여하지 않고 관찰하는 앎의 주체가 되어 있다면 그러한 상담은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이비상담자는 상담이 실패한 이유를 내담자에게 돌립니다.


자신은 내담자의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내담자는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실패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런 것은 상담이 아닙니다. 계몽입니다. 근대에 이루어지던 핵심활동입니다.


계몽의 골자는 이러합니다.


"게임메뉴얼처럼 최고의 앎만 손에 넣으면 그 권위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으며,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식민지로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려고 진격하던 무리들은 다 이 최고의 앎을 갖고 있다고 믿은 근대의 주체들이었습니다. 모든 마음은 어쩌구 하며 이제 메타인지의 놀라운 힘을 보유한 깨달은 이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러 나가자, 라고 하는 등의 얘기들도 다 같은 근대적 스토리입니다.


철지난 왕, 그렇기에 철없는 왕의 스토리입니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던 1차 산업혁명 시절에나 하던 얘기를 스팀펑크라는 SF적 소재처럼 변주해 오늘날 마치 최신의 얘기인 것처럼 하는 이 늙은 정신은 정말로 죽음의 계곡을 떠도는 근대라는 이름의 굴절된 코끼리의 망령과도 같습니다.


실체도 없으면서, 그 몸집이 과장되고 또 과장되어, 그렇게 일그러지고 또 일그러져 유난스럽기만 한 메타인지의 신화가 들려오는 곳은 이처럼 자신의 죽음을 망각하고자 하는 늙은 코끼리의 묘지입니다. 그 신화는 결국 자신의 시간을 망각한 것이 내는 서러운 자위의 소리입니다.


자신의 시간을 잃은 이들이 언제나 사이비가 되고, 또 사이비에 빠집니다.


이 지점만은 왜 자기객관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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