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근처 중학교 운동장을 돌면 만나는 두 명의 소녀가 있다.
아침의 샴푸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시 머리를 감고 나오는지 스칠 때마다 향기롭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오만한 문구인가)
전지현이 광고하는 엘라스틴 향이다.
언젠가 저런 넘실대는 긴 머리 소녀와 아름다운 사랑을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내가 지키지 못한 약속이 어디 그뿐이던가. 그래도 그 약속은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 한 것이었다).
다시 전속력으로 한 바퀴.
추억이 딱딱하게 굳은 내 심장 껍질을 깨뜨리고
노른자위를 뚝뚝 흐르게 한다.
꽤 너른 운동장.
쏙독새 지저귀는 소리인지 두 소녀의 웃음소리인지
밤공기가 가득 젊어 있다.
내일 잡힌 면접과 종아리 튼살과 어떤 티브이 프로그램을 떠들고 있었지만
정작 하고 있는 것은 매일 저녁 우정을 확인하는 일인 것 같다.
어린 충청도 사투리로 듣는 소녀들의 장래 포부는
부산 사투리로 하는 다짐보다 더 나약하고 비현실적이게 들리지만
추월할 때마다 귀 기울이게 된다.
그래 니네들은 영원히 그 나이로 있어라.
세상에는 절망이 몇 번 있을 것이다.
나는 플라타너스 잎이 푸르던 잎을 흩뿌리듯,
절망에 빠진 나머지 영원히 변치 않을 줄 알았던 결심을 떨어뜨리곤 했었다.
대상포진처럼 그 결과가 일생을 따라다니는 실수도 범할 것이고,
발각의 공포가 숨어서 기다리는 원치 않는 비밀도 갖게 될 것이다.
'다음날 아침' 혹은 '아침이 되자' 이 두 단어로 시작되는
기가 막히는 운명의 장난을 맛보게도 될 것이다.
언젠가 말했듯이 아름다운 것을 볼 때면 나는,
아직 보이지 않는 그 이후의 슬픔을 당겨 본다.
아무튼 젊은 여인들은 저마다 다른 식으로 마음에 여운을 준다.
내가 제정신이냐고?
그 질문은 아주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보기보다 까다로워 마땅한 대답을 찾기 힘들다.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