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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인 Feb 16. 2020

엄마냐.일이냐 03

벌써 20년 !!! 달고 쌉쓰름한 자영업 분투기 11

그 뒤로도 여러 날동안 나는 아이들 데리고도 가고 혼자도 가고

분당에서 서울까지 그야말로 풀방구리에 생쥐 드나들 듯 그 거리를 헤매 다녔다,

그냥 내 집을 꾸밀 요량이었다면 그렇게 열성으로 헤매고 다니지는 못했을 것 같다. 


나는 그 아이템이 내가 꼭 해야 하는 아이템이라고 직감했다.      

사업적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도 아니고 그냥 매료되었다고 밖에 말을 못 할 그 무엇에 

난 첫사랑에 취한 열여덟 처녀처럼 열병을 앓았다. 


계획은 했지만 워낙 특이하고 정보가 없는 사업이라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랐다.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누가 옆에서 이래이래 해라 라고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라 막막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귀인을 만나기를 기도하며 이태원 동네를 시간 날 때마다 돌아다니는 일이었다.      

의류는 동대문, 생활용품은 남대문 이런 식으로 수입업자들이 무리 지어 있는 업종도 아니고 

지금처럼 두드리기만 하면 정보가 쏟아지는 인터넷 지식 시대도 아니고.


그때 당시 유명 앵커 백지연 씨가 쓴 에세이에 후배가 뭘 먹고살까 물어왔길래 

자기가 '인터넷 서핑'을 해서 이래이래 해보라고 조언을 해줬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어떻게 정보를 얻지? 인터넷이 뭔데?라고 궁금해했던 시절이었다. 

진짜 그랬다. 지금 들으면 웃음이 나는 이야기인데 이게 불과 20년 전이다. 


여하튼 그렇게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다 보니

이태원 동네에서 유럽 앤틱을 팔던 상인들 서넛과 면을 트게 되었다. 

오며 가며 인사도 하고 비싸지 않은 소품들도 더러 팔아주고 

애를 포대기에 업고 돌아다니는 게 신기했던지

가게 들어와서 쉬었다 가라고 하시는 중년 사장님도 있었다.      

점심 겸 간식 겸 먹는다며 먹음직스럽게 삶아낸 고구마를 먹고 가라고 한사코 권해서

근사한 유럽 앤틱 가구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그 뜨거운걸 후후 불어먹던 생각도 난다. 


지금은 앤틱 사업이 커지고 전문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이태원 작은 골목길에서 움튼 작고 옹기종기한 모양새였다. 

대부분 장사가 나이 드신 분들이었고 다른 데서 딴 장사하다가 우연히 이 일을 시작한 내 또래 여자 딜러들이 한둘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젊은 여사장 한 명을 알게 되었다

이거 하게? 에이... 돈 안돼 그냥 있어 아기나 키우지 뭘 한다 그래.. 

어떻게 하면 앤틱샵 시작하냐는 내 물음에 다들 이렇게 정색을 했었는데

이 언니는 적극적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당시 내가 살던 분당은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신도시였고 언니 말에 따르면 그런 동네서 미리 터 잡고 단골만 잘 모으면 괜찮다고 적극적으로 나를 꼬셨다.      


안 꼬셔도 술술 넘어갈 판이었는데 될 거라고 응원까지 받고 보니 

내 마음은 벌써 반 가게를 차린 거나 진배없었다.      

사람이 마음을 먹기까지가 오래 걸리지 한번 이 길을 가겠다 결정을 하니

다음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집 근처로 가게를 알아보니 딱 앤틱 샵 하기 맞춤한 자리가 있었다.

대부분 맘먹고 알아보면 자리는 다 있다. 자리가 좋아서 딱 맞는 게 아니고 눈에 뭐가 씌워서

정말 이상한 자리도 나를 위해 마술처럼 준비된 자리처럼 보인다. 

바닥 면적은 손바닥만 한데  위아래 복층으로 되어서 키가 껑충하게 높은 구조였다

복층이라기보다 약간 다락같은 느낌이어서 윗층에 올라서면 천정에 머리가 닿을까 말까 아슬아슬했다. 

기억자로 꺾인 난간을 짚고 서서 내려다 보아도 아래층의 구석구석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이는 바닥면적 8평짜리 작고 귀여운 가게였다 

나는 그게 더 맘에 들었다.      

난 그 가게를 다락집이라고 불렀고 계약도 하기 이미 저기에는 뭘 놓고.. 저기엔 뭘 걸고... 머릿속으로 가게를 꾸몄다 헐었다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게 월세는 한 달에 50. 

비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장사가 안되면 결코 부담 없다 할 수는 없는 금액이었다. 고민이 되었다. 

애들 때문에 그렇다고 어디 더 나은 자리가 있다고 해도 선 듯 더 먼데로 갈 수도 없어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네에 있는 가게 자리 중에서는 그게 기중 나았다.      

그래도 망설여졌다.

장사가 되어도 그만 안되어도 그만인 무슨 취미 공방 같은 것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기도 듣기도 생소한 유럽 앤틱을 그것도 어디  시내 사거리 잘 보이는 자리에 차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만 신도시 주택가이지 지나가는 사람이래야 순 동네 사람 그 얼굴이 그 얼굴인 동네에 그걸 차리겠다는 거니까 지금 생각해도 당연히 망설일만했고 그 고민 끝에 결국 일을 저지른 것이 더 신기했다.      

고민이 깊어지니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이른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서 산책 삼아 아침마다 그 가게 앞을 한 바퀴씩 돌았다.

열리지도 않고 말없이 묵묵히 서있는 가게 건물을 우두망찰 올려다 보기도 하고 길 건너 교회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기도인지 주문인지 저 가게 하게 해 주세요... 누가 대단히 뜯어말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려 보기도 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큰 애 손을 잡고 그 가게 앞을 지나면서

엄마가 여기서 가구 장사를 하려고 해....라고 말해주니까 

아이는 그 날부터 당장 그 가게를 엄마 가게라고 불렀다.      

장사가 잘 안 되는 피부관리실 자리였는데 선팅지를 그 큰 복층 창 전면에 꼼꼼히 발라놓아서 내부는 1도 안보였지만 한번 들어가 본 가게 내부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남편은 당연히 반대했다. 

선비 같은 성격답게 펄펄 뛰거나 나를 밟고 가라.. 절대 반대를 외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걱정된다고 나에게 대책을 요구하길래. 

새벽부터 나서야 하는 음식장사도 아니고 하루 종일 안 연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는 가구 장사 인 데다가 물건도 특이해서 여기 아니면 어디 딴 데서 살 수도 없다. 예약받고 나오면 된다. 

애들 건사하고 하루에 딱 5시간만 열겠다. 다짐을 했다.      

그랬던 남편이 2년도 안되어서 전국으로 배달 다니고 본인이 직접 골동 가구 닦고 광내고 했으니 세상일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그때는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고 덥석 그러라고 대답해주었다. 


(앤틱은 누가 살까 01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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