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달고 쌉쓰름한 자영업분투기 23
이후 나는 서현 샵을 정리하고 더 넓은 창고를 새로 얻어 창고형 매장으로 재오픈을 했다.
블럭조의 단순한 창고를 앤틱 쇼룸으로도 쓸 수 있도록 화장실 공사도 하고 중층 공사도 새로 했다.
돈은 꽤 들고 살림하랴, 장사하라, 창고 공사하랴 혼이 달아날 정도로 힘들었지만 당시 흔치 않던 창고형 앤틱 매장이라서 오픈하자마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많이들 찾아와서 힘든 줄도 몰랐다.
하지만 막상 이후에 매장을 옮겨야 하는 시점이 되었을 때 남의 창고에 돈 들여 공사한 게 어찌나 아까웠던지. 이후에는 절대 인테리어에 큰돈 안 들여야지.... 다짐 다짐하게 되었는데 이게 참 아이러니인 게. 내가 매장을 아예 사서 꾸며서 장사하면 참 좋지만 매장 옮길 때마다 그걸 다 살 수도 없고, 나중에 상권이 어찌 될지 모르니 돈 있다고 막 아무거나 살 수도 없고, 장사를 할라니 인테리어는 해야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경우가 많다.
창고형으로 공간이 넓어지니 손님도 늘어났지만 필요한 물건도 많아져서 1년에 서너 번씩은 꼬박꼬박 유럽 출장을 나갔다. 파운드 환율이 2000원을 넘나들던 시절이었지만(지금은 1500원 언저리) 수입을 하기만 하면 판매는 수월했던 호시절이었다.
출장을 갈 때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들들도 데리고 다녔고
에너지가 더 넘칠 때는 시어머니까지 두루두루 모시고 프랑스로 벨기에로 영국으로 여행겸, 출장 겸 그렇게 열심히 물건을 위해 뛰어다녔다.
앤틱을 주로 파는 와중에서도 나는 계속 다른 아이템 뭐 수입해서 팔만한 것 없나...
촉수를 곤두세우고 열심히 서칭을 했던 것 같다.
어디서 누가 예쁜 아이템 팔고 있으면 저런 건 어디서 갖고 올까.
중국산 같지는 않고. 바닥도 뒤집어 보고 인터넷에서 찾아도 보고. 여기저기 물어보고 그렇게 열심히 다음 먹거리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결코 중단한 적이 없었던 듯한데 이건 어찌 보면 장사꾼의 본능 같은 것 같다.
당시 러시아와 동유럽의 국가들에서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푸른 무늬의 도자기 그릇들이 우리나라에서 한창 유행했었다. 그릇 자체도 이뻤지만 앤틱가구랑 참 잘 어울려서 저걸 수입해서 같이 팔면 괜찮겠다 싶었다. 러시아 물건은 아직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지도 않고. 내가 하면 좋겠다. 마음을 먹었다.
아는 지인이 러시아 쪽으로 인맥과 정보가 있어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나는 그 지인을 열심히 닦달해서 나를 한번 러시아에 데려가 달라고 엄청 졸랐다.
그릇 공장이라는 게 러시아 모스크바 아무 데나 널려 있는 것도 아니고 러시아 그릇 공장 정보는 인터넷을 뒤진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백방으로 수소문을 시작했다. 러시아 대사관인지 영사관인지에 전화도 해보고 반응이 시큰둥한 대사관 직원을 붙들고 너네 나라 물건 수입하러 간다는데 왜 이리 성의 없냐 모른다고 하지 말고 소상공인회 같은데 전화 좀 해보고 나 좀 도와주라 공연히 큰소리 땅땅 쳤으니 비자업무만 해서 자기는 모른다는 그 러시아 직원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여북해야 러시아 쪽에서 10년 전에 선교하시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쫓겨 오신 선교사분을 수소문해서 이리저리 정보를 얻어보려고 꽤 먼 경기도 북쪽 어디 도시까지 그분 만나러 찾아다니고 그랬었다.
정보 한 줄 얻어보겠다고 구천을 떠도는 심정으로 눈이 빨갛게 돌아다니곤 했다.
내가 맘에 드는 아이템을 수입하고야 말겠다는 이 열정을 어디서 왔을까
아마도 그 옛날 말 끌고 낙타 끌고 비단이니 향료니 가방에 잔뜩 싣고 사막을 건넜던 실크로드 상인의 피가 나한테 흐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금은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참 겁도 없고 욕심도 많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찌어찌 정보를 긁어 모아 결국 모스크바에 갔다.
와.... 춥기는 겁나 춥고. 거기도 여름엔 그렇지 않다던데 하필 갔던 때가 12월이라 붉은 광장인지 빨간 광장인진 크레물린 앞마당에서 꽁꽁 얼어 죽을 뻔했던 기억이 난다.
모스크바에서 차를 대절해서 두어 시간 부족으로 더 달려간 곳에 그런 류의 그릇을 파는 공장도 아니고 마을이 모여 있었다. 아... 거기를 가보니 러시아가 아직 공동 노동을 하는 공산사회구나..라는 것을 확 느낄 수 있었는데 공장이라기보다 마을회관같이 생긴 건물에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앉아 한쪽에선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한쪽에선 그걸 가져가다 들입다 굽고 있었다.
생각보다 공장시설이 열악해 보여서 아... 물건은 괜찮으려나..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웬걸. 공산화가 되기 전에 화려하고 철없던 왕족과 귀족의 시간이 그토록 길었던 덕분인지. 이들의 도자기 기술이나 한눈에도 썩 괜찮았다. 무뚝뚝한 아줌마들이 내가 옆에만 가면 그 파랗고 큰 눈을 어찌나 번쩍 떠서 경계를 하는지 가까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얼핏 얼핏 보아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 정도 퀄리티면 가져다 팔면 잘 팔리겠어.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과 사이즈를 확인하고 나는 먼 길에 꽁꽁 긴장했던 마음이 다 스르륵 풀리는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고생이야 얼마든지 더 할 수 있다. 물건만 확실하면 다 상관없다.
내어준 커피를 느긋하게 홀짝거리면 얼마나 오더를 할까... 머리를 굴리는 중에 문득 여기서는 물류를 어떻게 하나. 궁금해졌다.
니들은 어떻게 물건을 보내주세요?
내 질문에 공장장은 나를 한참 빤히 보더니.
우리는 물류는 안 해 니들이 가져가
하는 것이었다.
엥? 물류를 보내주지를 않는다니
이 무슨 황당? 나는 당황했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어찌어찌 해도 수입은 할 수 있겠지 마음을 진정시키고 왜 안되는지 이유를 찬찬히 들어봤다.
이유인즉슨.
러시아는 해외로 물건을 수출할 때 하도 공무원이니 경찰이니 여기저기 관료들이 너도나도 기웃기웃 각종 명목으로 ‘관리비’를 요구해서 물건을 만들어서 수출을 좀 하려고 해도 그런저런 이유로 뜯기고 시달리는 게 무서워서 공장 사장들이 해외 바이어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쩐지 공장 여기저기 복도나 마당 담벼락 같은데 딱 봐도 약간 러시아 마피아 똘마니같이 생긴 덩치 좋은 남자들이 하나둘씩 촌스러운 유니폼 같은 것을 입고 즈이들끼리 잡담하며 우리 일행을 힐끗거려서 상당히 신경이 쓰였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들이 노동 현장마다 배치된 공무원들이나 경찰들이 아닐까 싶었다.
어쩐지 내가 들어서도 별로 좋아하는 기색도 없고 오히려 귀찮아하는 것 같은 태도가 맘에 걸리더니 물류니 수출서류니 하는 얘기가 나오자마자 얼굴색을 딱 바꾸면서 자기들은 공장 대문 앞까지만 내어줄 수 있고 그 이후에는 싣고 가던 끌고 가던 알아서 하라는 말이었다. 아.... 이것은 너무 큰 난관이다.
지금 같으면 어찌 더 길이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내가 수입하을 하려던 양 자체가 많이 않았기 때문에 기껏해야 한국으로 귀국하는 교민 짐에 어찌어찌 넣어서 갖고 들어오거나 여하튼 정석적이지 않은 꼼수를 찾아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양이 엄청 많다면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거기까지가 내가 수입 루트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한계였다.
출장 일정이 딱 이틀뿐이었어서 공장에서 수출 절차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러시아에서 물건 수입을 하는 일은 유럽이나 동남아 시장과는 접근 자체를 달리했어야 했는데 너무 순진하게 현장 가서 부딪히면 다 되겠지... 너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 내 실수였다. 이것도 다 공부다...라고 생각하기에는 결과가 너무 뼈아팠다. 예쁜 그릇들을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너무너무 시렸다.
모스크바에서 차를 대절해서 왕복 다섯 시간을 달렸는데 그 수고가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근데 수입을 하다 보면 이 정도의 난관과 헛수고는 사실 아주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게 싫어서는 해외 바잉을 다닐 수가 없다.
세상 어디에도 나만 알고 누구나 이쁘고 값도 싸고 그러면서 수입 수출도 수월한 그런 물건들은 없었다.
(앤틱을 누가 살까 13 -인도 이야기 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