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달고 쌉쓰름한 자영업분투기 26
만일 그때 내 친구가 '우리 회장님이 평생을 고급스러운 일만 하셔서 앤틱도 좋아하셔.
그래서 너 데려오래' 이랬다면 별로 믿음이 안 생겼을 것 같다.
평생 빠칭코 장사하던 음지의 회장님이
어느 날
아.... 나도 이제 고급스러운 일을 좀 하고 싶어...
하면서 유럽 앤틱 비즈니스를 요구했다니 얼마나 자연스러운 접근인가.
인간의 본성에 딱 들어맞는 전개였다.
자기들 팀원 하나가 웹에서 찾을 수 있는 국내 앤틱 업체 이름을 검색하다가
우리 사이트를 발견하게 되었고 내 이름이 워낙 특이하니까 바인스 앤틱 바인스 앤틱... 어?! 나 얘 아는데?
우리 교회 동창인데? 이렇게 된 스토리였다.
사기 같지도 않고 어쩐지 살면서 한 번은 선물처럼 만나게 되는 동화 같은 제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솔깃했다.
기회는 잡는 놈이 임자라고, 자영업으로 늙어 죽을 것도 아니고, 누군가 내 능력을 알아봐 줄 때. 그리고 무엇보다 빠징코 자본이든 도박판 자본이든 어마어마한 예산으로 우리나라 고만고만한 앤틱 샵들을 캭 찍어 눌러서 까불지 못하게 해주고 싶은 좀 유치한 욕심도 있었다.
난 그만한 돈이 없으니까 어떤 회장님이 나를 믿고 밀어만 주면 유럽에서 내가 군침만 삼키고 언감생심 사지 못했던 물건들은 다 수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물건들을 들여오면 우리나라 돈 많은 고객들한테도 접근하기 쉬울 것 같았다.
바야흐로 상위 1% 마케팅에 접근할 수 있는 계단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쪽에서 먼저 제안한 일이라 이야기는 의외로 쉽게 풀려갔다.
창고와 재고 등을 모두 인수하고 사이트와 운영권, 게다가 어마어마한 경험을 가진 불세출의 바이어 이바인까지 모두 가져가는 조건이라고 엄청나게 내가 가진 걸 부풀렸다.
살면서 이렇게 낯빛 하나 안 붉히고 나 이런 사람이야 빵! 이렇게 배짱을 부린 때가 없었다.
못된 건 금방 배운다고 했던가.
상대방이 껌 깨나 씹은 회장님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뱃속에는 전에 없던 시건방이 금새도 차올랐다.
상대방이 돈이 많다고 하니 이게 적당한 조건인지 아닌지 따져볼 것도 없이 맘껏 불렀고.
몇 번의 조정을 거치고 그 정도면 회장이 오케이 하실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내 딴에는 세상에서 살면서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는 금액을 덜덜 떨며 너 미쳤구나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냅다 불렀는데 오케이라니.
너무 내가 서두르는 것처럼 안 보이려고 일부러 전화도 안 하고 기다렸다.
니들이 이익되는 계약이니 니들이 서둘러라 나는 엉덩이 좀 빼겠다.
이걸 어떻게 티 안 나게 보여주나... 그걸 고민하느라 겉과 속이 다른 며칠을 보내는 게 제일 힘들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회장님께서 이 사업에 전체적으로 100억 정도를 투자할까 생각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아... 내가 너무 적게 불렀구나. 이런 세상 멍청한 년. 빠징코 회장이라잖아. 니 새우 뱃속만 한 배포로 그렇게 작게 요구를 하다니 세상 멍청한 년 온갖 후회가 몰려왔다. 인간의 욕심이 이렇게 끝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참... 뜬구름 같은 허영에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킨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이 비즈니스에 무려 100억을 투자할 것을 맘먹고 계시다는 회장님의 얼굴을 처음으로 내가 본 것은
그 어마어마한 회사 로비도 아니고 회장실도 아니고 9시 뉴스 티브이 화면에서였다.
“바다이야기 *** 회장이 오늘 구속되었습니다”
그랬다.
그 빠징코 오락실 본사라는 곳이 바로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바다이야기’ 그 업체였다.
나는 처음에 내 친구가 바다 어쩌구라는 업체라고 하길래.
무슨 수족관이나 어항 파는 회사에 다니나... 했었다.
돈이 많은 회사라는 것이 중요했지 회사 이름이야 바다이야기면 어떻고 우주 이야기면 어떠랴.
1도 관심을 안 기울이고 완전히 흘려들어서. 나중에 세상이 떠들썩하고서야 아... 그 친구가 말한 회사 이름이 떠올랐다.
그 친구가 다닌다는 회사가 바로 바다이야기 그 회사이고. 그게 어항 파는 회사가 아니라 성인 오락실 체인본부이고. 그 회사가 망하면서 앤틱 비즈니스고 뭐고 다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한 번에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닭 쫓던 강아지가 지붕을 쳐다볼 때 딱 이런 기분이겠구나... 아...
정말 딱 내가 그 꼴이었다.
그날 이후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우리 창고를 오가던 그 친구의 연락이 딱 끊겼고.
그 뒤로도 다시 나한테 연락 오는 일은 없었다.
난 오히려 그 후에 그 친구는 일을 어찌하고 있는지. 그 회사 나와서 다른 일을 찾았는지. 안부가 궁금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친구의 마누라와 애기들도 전에 한동네 살았던 적이 있어서 두루두루 아는 친구였는데 지금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건강히 잘 살고 애들 잘 키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나가면 다 경험이고 이야기 거리인 것을 당시에는 몇 주 동안 일에 집중도 못하고 헛물만 켜다 내 꼴이 우습게 된 것 같아서 많이 속상했었다.
내 입장에서는 하나도 손해 된 것은 없지만 다 잡은 물고기를 그것도 평생 다시 못 볼 대어를 눈 앞에서 놓친 것 같아서 내내 속이 쓰렸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사실 나한테 맞지 않는 자리였겠다 싶기도 하다.
뭐든지 욕심이 과하면 화를 당한다고. 그 큰돈을 나를 주고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마늘공이로 마늘 찧듯이 나를 콩콩 찧어댔을까. 삼키지 말아야 할 돈은 처음부터 욕심을 안 내는 것이 수였다는 생각이 들고 하나님이 마지막 순간에 나를 지켜주셨구나.. 제법 철든 성찰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번 크게 출렁인 마음을 다시 다잡으려니 죽을 맛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에효... 꿈 한번 화려하게 잘 꾸었네... 하면서 잊고 정리하는 수밖에..
그렇게 나의 자리로 꾸역꾸역 돌아오느라고 한참이 걸렸다.
(앤틱을 누가살까 16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