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그릇
도서관의 냄새는 서점과도 다르다.
새로 바른 풀 냄새나는 서점과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냄새의 차이만큼
그 안에 담긴 정보의 유효기간도 다르다.
오랜 시간 인간의 지식을 담는 그릇으로
군림해 온 종이책은
파피루스나 죽편처럼
박물관 유리관 뒤로 사라지게 될까?
일주일 전의 정보가 낡은 것이 되는 시대에
10년, 20년 전의 묵은 종이뭉치들이 여전히 유효한가?
어쩌면 벌써 내리막 계단을 밟고 있는 것일까?
워드로 글을 쓰고 파일로 주고받으면서도
읽을 때는 출력한 종이를 손에 들고 보는 것을 선호하는 내 습관도
사실은 구식이다.
하지만 손 끝에서 팔락 넘어가는 책 읽는 감촉과
책 냄새를 기억하는 인류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괜히 서운하다.
종이가 가진 '그릇의 본질 밖'
책에 담긴 것이 활자뿐이라면
전자문서로 대체되는 것이 맞다.
스마트폰으로 읽어도
톰 소여는 개구진 소년이고
단테의 지옥은 9층이고
조선왕조 실록은 여전히 25분의 왕의 기록을 담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종이 재질의 감촉과
페이지를 넘길 때 팔락하고 나는 소리,
책의 표지나 띠지와는 다른 본문의 색감,
햇빛에 바랜 책장을 펼쳤을 때
페이지 안쪽의 바래지 않은 책장 안에서
풀썩 풍기는 오래된 책의 냄새.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맞춤법이 인쇄된 문장들이 보여주는 오래된 시간.
이런 것들도 책을 읽는 동안 따라오는 경험이었다.
손에 들린 두꺼운 책의 무게와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난 후 덮인 뒤표지를 내려다보는
작은 완성을 실감하는 순간까지도…
종이책은 매일 발행되는 뉴스보다 긴 호흡의 매체다.
그럼에도 책에 담긴 정보의 유효기간조차 일 년에서 한 달,
일주일, 하루로 시시각각 짧아지는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저 도서관에 켜켜이 쌓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낡은 매체라는 사실에도
책에는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
누구나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검증을 거친 사람만 출간의 기회가 오는 종이책의 태생적 폐쇄성 말이다.
점점 출간이 조심스러워지는 시대를 맞은 지금,
종이책 출간 이력이 있는 작가는
그 자체로 인증받은 작가의 아우라를 선사한다.
비 출간 작가인 내게 이 경계는
동그라미로 가둔 볼펜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
책벌레 앞에 그려진 뚜렷한 선으로 느껴진다.
여전히 종이책은 손에 만져지는 그 실체 덕분에
디지털로 담을 수 있는 정보에 더해서
오감을 자극하는 입체적인 경험을 덤으로 주어 왔다.
책은 지식만을 담은 그릇은 아니었나 보다.
종이가 보존하는 '인간의 지적 과정'
새삼스레 종이책의 운명에 감정이 진하게 이입된다.
인간의 물성이 AI에 꼴딱 삼켜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실체 없는 불안 중에
이렇게 손끝으로 만져지는 책의 존재감의 재확인은
'뾰족한 수'로 다가온다.
인간에게도 똑부러지는 AI로는 대체할 수 없는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는 시대가 온 것이 아닐까?
물론 지난 10년 전 출간된 미래를 예측하는 책에는
결국 예측에 실패한 결과들이 박제된 오답의 무덤 천지다.
하지만 그들의 예측은 추론의 과정을 세세히 한 권 가득 채우고 있고,
그들이 추측한 미래에 도착한 나는
틀린 답지의 풀이과정을 보며
정답과 오답의 오차가 나기 시작한 지점을 찾아 들여다본다.
AI의 방식이라면 틀린 결과에 도착한 시점에
이런 책들은 폐기해야 하는 정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오답지도 필요하다.
“하나의 검증된 정답만 남기고 과정을 폐기하는 AI방식에서는 오답노트의 기능이 없지 않을까?”
오래전 읽다 만 책을 다시 읽을 때,
한쪽 귀퉁이가 접힌 페이지를 보며
지난번 내가 포기한 지점을 확인하듯
완벽한 기억력도, 정답을 머릿속에 영구히 보존할 능력도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재검토하는 습성을 가졌다.
덮었던 책을 다시 펴서 확인할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사라진 답지를 궁금해하지 않을 AI와는 달리
우리는 그런 많은 실수들을 밟고 올라와 지혜를 얻었기 때문이다.
AI는 인간들의 과정을 지우고
결과만 보관하는 창고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의 폐기는 효율적일 수 있어도
인류의 생존에 공기와도 같은 개념인
다양성이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매끄럽게 잘 빠진 하나의 정답만을 예상하고 걷는
미래에서 만나는 작은 변수는 얼마나 치명적일까?
다양성을 버린 사회나 종족이 함몰되어 사라졌던 경우는
이미 많이 보아 온 오답 중 하나이다.
오래된 미래
도서관은 더 이상 책의 '양'을 자랑하는 창고나
빠른 정보를 전달하는 허브가 될 수 없다.
공장에서 쉽게 만들어지는 공산품의 황금기에도
구증구포(九蒸九曝)로 나무를 다듬고 고집스럽게 방망이를 깎던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도서관은 느리고 비효율적일지라도
긴 시간 동안의 인간의 실수들을 보관하는 오답노트로 남길 바란다.
책 한 권을 읽는 그 긴 호흡 속에서
여전히 오래된 종이책의 냄새와 손 끝의 종이 감촉과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덤으로 주며...
지식의 그릇이 변화하는 지금 같을 때에도
겹겹이 쌓인 오래된 미래이자
놀이터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