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좀처럼 일기를 쓰지 않았다. 반듯한 공책을 꺼내고 펜을 들어 그 안에 나의 하루를 복기하듯 써내려 가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기도 했고, 무언가 기억할 일이 있으면 휴대폰 메모장에 쓰는 걸로 충분했다.
한국에서 쓴 일기는 초등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방학 마지막 날에 나의 상상력을 발휘해 다섯 줄 정도로 두 달의 행적을 적어 내려간 기록이었고, 일기보단 소설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나의 일기장의 날씨는 다른 친구들의 일기장의 날씨와 달랐으므로 나는 그다지 꼼꼼하지 못한 성격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여행 계획이 잡히면 가장 먼저 일기장을 사러 간다. 공책은 재킷 앞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작고 편리한 공책이어야 한다. 스프링이 달려 펜을 꽂을 수 있으면 더 좋다. 디자인은 예뻐도 좋지만 굳이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 색은 튀지 않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도 꺼낼 수 있게. 마음에 드는 일기장을 사고 나오면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일기장이 손에 닳아 모서리가 헤지고 비에 젖어 페이지들이 쭈그러지고 먼지에 덮여 쾨쾨한 냄새가 날 때쯤이면 이 안에 삐뚤어진 글씨로 기록된 순간들이 얼마나 흥분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으므로. 여행지에서는 매일같이 특별한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므로, 여행지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도 특별해지므로.
네팔을 여행할 때 일이었다. 하루 동안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일기에 옮겨 적으려 했는데, 하필 숙소에 도착하니 재미있는 사람들뿐이어서 그들과 노닥거리느라 일기 쓸 시기를 놓쳐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모여있던 다이닝룸은 마감을 하고 남아 있던 불빛은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잘 자 라는 인사를 하고 짐을 챙기려는데 침대 한편에 널브러져 있던 일기장을 발견하고 나서야 그날 일기를 쓰지 않은 걸 알았다. 나는 쌓여버린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잡아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결국 일기장을 들고 불빛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방에 들어가니 다른 여행자들이 자고 있었다. 문을 닫고 나와 그 옆을 돌아보니 환한 빛이 보였다.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들어갈까 잠깐 고민했다.
아니다, 인간의 도리는 도저히 저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일기장과 펜을 들고 숙소 밖으로 나와보니, 이게 웬걸, 화장실 빛만큼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밝은 달빛이 있다. 일기를 쓰기엔 충분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앉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였기에 마지막 남은 핫팩을 손등에 붙이고 덜덜 떨어가며 쓰고 있으니, 글씨가 삐뚤삐뚤 한글인지 네팔어인지 잘 분간이 안 갔지만, 괜찮았다. 덕분에 돌아와서 킥킥대면서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