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들은

by 현진현
Berlin, 2015


강원도 원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공익광고 수업이지만 코바코(한국방송광고 진흥공사)와 학교 측의 부탁으로 광고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정확하게 내 아들과 같은 나이들. 작고 똘망한 눈빛들이 나를 쳐다본다. 전국 어떤 고등학교를 가 보아도 이런 학생들은 흔치 않다. 집중해서 쳐다보는 모습들이 사랑스럽다. 우주와 해주도 저럴 것이다, 생각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120분의 시간은 짧지 않다. 학생들이 졸음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내 목소리는 조금씩 높아진다. 사실 고등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광고의 세계]라기보다 [영상광고의 세계]거나 좋은 [문장의 세계]일 테지.


내가 만든 강의노트이긴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야기해보면... 나 또한 다시 동의하게 되는 것들이 따로 몇 가지 생긴다.



작가인 설터(James Salter)는 파티에 갔다가 어떤 이야기를 듣는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다.


남편이 아내의 자살을 도왔는데 어쩌다 일이 잘못되어 다음 날 자살한 아내가 이층에서 걸어 내려왔다는 얘기였어요. 내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내려와 남편과 새 여자 친구가 함께 있는 걸 봤다고 했어요. 이 얘기 속의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등장인물은 모두 상상한 거예요. - <어젯밤>, 설터


나의 TV-CM 입봉작은 형으로부터 들은 한 토막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한 토막이었지만 살을 붙여나가서는 다시 슬림하게 만드는 과정 - 그렇게 한 편의 TVCM이 탄생했다. 형의 얘기 : 서점에서 책을 찢는 여자를 봤다’는 게 전부였다. 여기에 살을 붙여 나가서 - 서점에서 물기 어린 여자를 잡지에서 본 여주인공(김민희였다)이 그 지면을 찢으면서 ‘왜 너만 촉촉한 거야?’하면 찢어지는 종이에서 물이 튄다는 그런 설정과 구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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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썼던 단편소설 가운데(물론 미발표작) <칸타타>는 강남역 뒤, 지금은 없어졌을 두 군데의 막창구이집 중 한 곳에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심지어 옆 테이블의 이야기였다. 또 다른 TVCM 하나는,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로부터 만들기도 했다.


Small Town

Bill Frisell & Thomas Morgan, 2017


제임스 설터의 단편집 <어젯밤>에 실린 작가의 편지(역자에게 보내는)를 보면 책의 표제작인 단편 <어젯밤>은 파티에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다. 들은 이야기와 소설의 다른 점은 물론 인물의 구체성 외에도 세부적인 설정들에 있다. 결말을 보면, 남편과 새 여자 친구는 영영 헤어진다. 새 여자 친구는 남편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새로운 이야기는 작가의 작가적 몫이다.


들은 이야기들은 바람에 실려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내 귀로 들어와 내 이야기처럼 내 속에 자리한다. 살다보면 이런 일들이 실제로 생긴다. 아니, 많을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의 이야기 말고는 모두 이렇게 ‘알게 된 이야기’들이니까.


어젯밤

제임스 설터, 2010



크리에이티브 아이디어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 그냥 상상보다는 말야, 듣고 나서 상상하는 게 더 재밌잖아.

[들은 이야기]와 [만든 이야기]가 싸우면 대체로 [들은 이야기]가 이긴다. 단어를 남발하면 이상한 사람이지만 단어의 끝을 잡고 끝말잇기를 하면 재치 있는 사람이다. 스토리텔링도 좋은데 스토리 리스닝도 좋다. 그러니 말하기 전에, 일단 듣자구요. 클라이언트의 이야기나 동료의 이야기를 잘 듣기만 해도 멋진 아이디어가 만들어질 때가 있다고. 하긴 잘 듣는 게 어렵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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