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연재
7
스타인웨이가 사라졌다.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악보를 가득 안고서 그 방의 문을 열었을 때 스타인웨이는 없었다. 스타인웨이가 있던 자리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먼지가 깔려 있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그 방에서 바흐의 푸가들을 연주했고, 오후에는 집근처 한 신학대학의 구내에 있는 음악전문서점에서 바흐의 악보들을 골랐다.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냥 집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스타인웨이가 사라졌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오히려 그 크고 무거운 피아노를 어떻게 가져갔을까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꿈에서 봤던 곳을 꿈에서 깨어나 다시 둘러보는 것만 같았다. 피아노는 어떻게 그 방을 들고 날 수 있었을까? 그 방의 출입문은 터무니없이 작았고 창 또한 아주 작았다. 피아노를 발견했을 땐 그런 의문조차 들지 않았던 것도 이상했다. 그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글렌 굴드와 그의 조율사가 분해를 해서 들고난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짐작을 해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때 내가 그 이상한 사건에 대해서 얼마간의 여유가 있었던 건, 왠지 모르게 피아노가 그 방으로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희망부터 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로부터 며칠 동안을 줄곧 굴드가 연주한 레코드들을 들었다. 어찌됐든 스타인웨이를 계속 즐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5층의 그 스타인웨이가 그리운 것은 당연했다.
피아노가 사라진 후 그 방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아노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물론, 누군가 사라진 피아노에 대해 말을 꺼낸다든가 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아노는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아침저녁,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 방을 찾아 피아노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피아노가 사라지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건물의 관리인과 1층 화방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피아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또 그동안 피아노를 치워버리진 않을까하는 조바심 때문에 혼자서만 간직했던 피아노의 존재를 김이사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는 5층에 방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5층에 방이 또 하나 있었어? …… 아, 그 창고? 난 안 들어가 봤는데? 거기 뭐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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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예민함에 비견될 만한, 그의 연주에 대한 청중들의 집요하리만큼 민감한 반응은 그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모든 기간 지속되었다. 토론토 외곽 작은 마을의 눈 덮인 작은 집을 떠나 그만의 피아니즘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보였을 때는 물론이고,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예가 자신이 살던 도시의 명성을 넘어섰을 때, 또 노년에 CBS의 스튜디오로 돌아와 골드베르크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을 다시 레코딩 해 추억의 스펙트럼을 진일보시켰을 때에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그의 피아니즘에 긴 박수를 보냈다. 게다가 광적인 부류의 팬들은 그의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벌써 그의 연주를 목말라하기도 했다.
굴드는 두 번의 은퇴를 했다. 첫 번째 은퇴는 콘서트무대에서의 은퇴였다. 굴드는 단호하게 콘서트 무대를 버렸다. 그것은, 청중의 열렬한 호응에 일곱 번의 커튼콜을 받고서도 더 이상의 연주는 정중하게 거절하고야마는 그의 완고한 제스처와 비슷했다. 굴드의 두 번째 은퇴는 북아메리카에 백년만의 추위가 올 것이라 떠들어대던 해의 어느 가을날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콘서트를 그만두는 것에 이어 레코딩마저 그만두는 죽음으로써의 은퇴였다. 완전한 은퇴였을까? 그것은 실패였다. 그의 죽음은 그의 명성을 북미와 유럽을 넘어 남미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까지 알린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때 스타인웨이의 명성도 함께 바다와 산맥을 넘었다.
요컨대 글렌 허버트 굴드(Glenn Herbert Gould)는 1932년 9월 25일 태어나, 1982년 북아메리카의 역사적 추위로 기록된 겨울이 닥쳐오기 전인 10월 4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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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 두드리다가 다시 흐느끼듯 흘러내리는 내 두 손과, 그 손들을 제어하는 내 이성을 통해 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내 삶을 드러낸다. 그것이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 내 눈앞에는 삶의 의미가 어른거린다. 나, 나의 손, 피아노 건반, 피아노 줄, 소리, 그리고 동향의 공간. 방의 모든 사물은 시간을 틈타 서로를 탐하고 있다. 아! 그런데 나와 세계의 매개가 사라졌다. 내가 표현되는 방식은 상상으로 그칠지라도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 …….
내가 기도했던 연주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나는 나를 둘러싼 일상 속에 머물러 있었으면 될 뿐이었을지도 몰랐다. 어디를 둘러봐도 구원 따위는 없다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삶의 손에 잡히는 형체, 다만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내게 분명했던 것은 오직, 내가 사는 방식이 점점 더 내게 익숙하게 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피아노가 사라졌다는 것, 그것이 반드시 불운한 것은 아니었다. 나빠진 것은 없었다. 나는 감상적인 고민에 빠진 것만 같았다.
며칠간의 짧은 휴가를 내고 좁은 내 아파트로 돌아왔지만 재미없는 TV의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거나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전히 회사로 달려가 스타인웨이의 부재를 다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심심치 않게 찾아들었을 뿐이었다. 휴가를 하루 남겨 둔 날 정오쯤, 끈질긴 전화벨이 울리기 전까지 말이다. 옛 여자 친구였다. 수화기를 든 나는 그 길로 그녀와 길고 긴 잡담에 빠져들고 말았다.
10
나는 가끔 기중기로 굴드의 피아노를 들어 올려 비행기의 조종석에 집어넣는 장면을 상상한다. 검정색 스타인웨이가 삐걱대는 목조 기중기에 매달리면, 머리가 뭉툭한 거대한 여객기는 전투기인양 조종석의 덮개를 열어젖힌다. 인간의 뇌에 손톱만한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듯, 기중기는 여객기의 머리에 스타인웨이를 안착시킨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글렌 굴드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것은 내가 본 그의 사진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굴드는 하얀 눈밭에 서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이었지만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굴드 뒤로 보이는 광활한 눈밭에 눈이 빨간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장면이 눈에 그려지곤 했다. 굴드는 사진처럼 충분히 고독했다. 그래서 슬펐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서른다섯 해 동안 지녔던 그런 슬픔과는 달랐다. 하기는 굴드가 연주한 모차르트는 늘 악평에 시달렸다. 평론가들은 굴드만의 곡 해석과 타건이 오직 바흐에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굴드는 모차르트식의 슬픔과 대면할 필요가 없었다. 굴드 또한 모차르트처럼 음표 뒤로 무엇인가를 감추었지만 그것은 슬픔을 넘어서는 다른 성질의 무엇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굴드는 골드베르크변주곡을 제외하고는 같은 곡을 두 번 이상 레코딩하지 않았다. 굴드는 그런 식으로 연주를 하는 자신의 개성을 깊이 존중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연주를 표현해주는 스타인웨이의 개성 또한 존중했다. 나아가 두 개의 중첩된 개성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개성까지도 굴드는 존중했다. 그리고 굴드는, 자신 역시 한 명의 청중이었으므로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연주를 사랑했다. 그에게 있어 연주는 자신이 살아가는 삶 자체였고, 그 소리를 만드는 과정은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적어도 굴드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방식 가운데 하나임에 분명했다. 말하자면 그의 예술은 그의 삶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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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가 사라지고 해가 바뀌어 다시 초여름이 되었을 무렵, 나는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 방을 얻어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내 방 안에는 풀지 못한 이삿짐이 박스채로 가득했는데 그 속에 악보 따위는 없었다. 악보들을 어디에다 둔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해가 무척이나 드셌던 그 즈음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우연히 그리고 오랜만에 5층의 그 방 앞을 지나게 되었다. 무심코 걸음을 옮기던 나는 그 방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았고 누군가 그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척이나 놀랐지만 걸음을 돌려 문 앞으로 다가간 나는, 스타인웨이가 있던 그 자리에 머리가 벗겨진 한 노인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늙어버려 겨우 얼굴을 알아 볼만한 글렌 굴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