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가수였다. 히지만 가수가 된 후 세상을 등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곡도 끝까지 부르지 못했다. 그런 그의 최후는 투철한 예술혼과 심오한 고집 때문이었다. 혹은 예술가로서의 예술적 선택이었거나.
1969년에 태어난 그는 올해 봄에 죽었다. 음악적 성과보다는, 숭고했든 그렇지 않았든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혼이 불타버렸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그가 가수로서의 삶을 한참 살아내고 있을 때, 중현은 인생의 팔 할을 기타리스트로 살아내는 중이었다. 십 대 때부터 여태껏 기타리스트로 살아온 중현은 2008년 10월 미국의 펜더(Fender)사로부터 기타를 헌정하겠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장 아들 셋 모두에게 전화를 걸었을 만큼 기뻤다.
또 펜더사로부터 헌정을 받은 소수의 명 기타리스트들이 떠오르면서 중현은 음악에 바친 자신의 삶이 아깝지 않다는 감회가 들었다. 펜더사로부터 헌정받은 기타리스트들의 면면이 떠올랐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제프 백(Jeff Beck), 그들 아래 세대인 에디 반 헤일런(Eddie Van Halen),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 그리고 중현, 여섯이 전부였다.
중현도 그들처럼 펜더사의 기타를 애용해왔다. 음악 인생의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20대 후반부터 중현은 펜더에서 출시한 스트라토캐스터(Stratocaster)를 쳤다. 물론 그 전엔 깁슨(Gibson)사의 기타도 쳤고 펜더의 또 다른 모델인 텔리캐스터(Telecaster)도 쳤다. 그러다 마흔 살 무렵부터는 공연을 하든 녹음을 하든 펜더의 스트라토캐스터만을 사용해왔다.
2009년이 끝나갈 무렵 드디어 기타가 헌정되었다. 중현이 바라던 기타였다. 보통은 기타리스트가 평소 연주하던 기타와 동일하게 만들어 헌정하지만 중현은 펜더의 여러 모델, 또 여러 시기에 생산된 기타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번 헌정 기타는 중현의 요청을 반영해 만들었다. 단단한 메이플 넥의 지판 위에 중현의 한글 이름 석 자가 크게 자개로 박혀 있었다. 만든 이의 정성이 느껴졌다. 바디와 픽가드는 모두 검은색이었다.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re)의 컬러 배열과 비슷했다. 하지만 픽업은 달랐다. 헌정식에 온 펜더사의 부사장은 픽업이 60년대 펜더가 생산한 최고급 싱글 코일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펜더사의 마스터빌더가 어떤 기타를 원하는지 문의해 왔을 때 중현은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사운드를 예로 들었다. 지미 헨드릭스가 한창 활동하던 60년대 말의 풍부한 사운드가 중현은 좋았다. 헨드릭스는 요절해버렸기 때문에 펜더의 스트랫을 그토록 사랑했지만 헌정받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지미 헨드릭스를 대신해 기타를 헌정받는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추구했고 드러났던 음악세계야 완전히 달랐지만 전성기의 록음악과 그 사운드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 중현은 살아남은 헨드릭스 일지도 몰랐다.
중현에게 헌정 기타는 그 기타 자체보다 수십 배 큰, 음악인생의 계기가 되었다. 펜더에서 기타를 헌정하겠다는 소식을 접한 그 순간부터 중현은 새로운 밴드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다. 남은 인생을 불꽃과도 같은 록으로 채워볼 생각을 했던 것이다. 헌정 기타라는 음악인생에 대한 보답, 그 보답에 대한 보답은 역시 음악이었다. 중현은 순수한 록을 구상했고 새로운 밴드를 고민했다.
중현은 당장 오디션을 하고 싶었다. 새 기타는 새 음악에다 담고 새 음악은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마음은 들떠 올랐지만 기타부터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타를 받기도 전에 오디션을 한다는 것이 뭔가 께름칙했고 아직은 기타의 사운드는 상상에 불과했다.
그러던 나날들이 때로는 느긋하게 가끔은 조급하게 지나고 지나 중현은 기타를 헌정받았다. 헌정식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기타가 헌정되는 순간이었다. 기타를 받아 든 중현은 앰프에 연결하지 않고 몇 마디 연주했다. 평생을 기타리스트로 살아온 사람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중현은 그렇게 아주 잠시 기타를 만져보듯 환영한 다음, 기타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자연스럽게 낡은 모양새의 스트랫이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제작자인 마스터빌더가 일부러 기타에 세월을 묻혀놓았다. 모서리가 닳았고 바디 곳곳의 페인트는 까져 있었다.
“이 스트랫은 ……마치 제가 살아온 세월 같습니다.”
중현은 펜더사의 부사장에게 영어로 말했다. 그리고 애틋한 눈길로 다시 기타의 이곳저곳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렐릭(relic)입니다, 선생님.” 부사장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펜더사의 관계자들과 저녁을 먹을 때에도 중현은 온 신경이 기타에 가 있었고, 또 새롭게 만들 음악과 밴드를 곱씹듯 구상했고,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새로운 음반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 중현의 생각을 펜더사의 부사장이 축복해주었다.
“이번 스트랫으로 새 음반을 내주신다면 저희와 기타 팬들 모두에게 영광입니다.”
큰아들의 차로 용인의 연습실로 돌아온 중현은 역시 펜더가 만든 최고의 기타 앰프 트윈리버브(Twin Reverb)에 헌정 기타를 연결했다. 금세 조율을 했고 여러 스케일을 옮겨가며 자신만의 릭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기타리스트인 큰 아들은 조용히 연습실의 문을 닫고 물러났다. 문을 닫았지만 중현의 기타 소리는 더 높아지고 있었다.
놀라웠다. 커스텀샵, 그것도 마스터빌더가 공들여 만든 기타였던지라 한 음 한 음 튕기는 대로, 치는 그대로 소리로 만들어졌다. 피크의 재질까지도 구분해서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중현이 연주한 소리가 중현의 귀로 들어오는데도, 자신의 연주임에도 중현의 온몸은 감동에 겨워하고 있었다. 중현의 블루스는 본래 다섯 개의 음에 기반해 가야금과 거문고가 뒤섞인 산조의 가락과도 닮은 터라 단아한 음향과 구구절절한 멜로디가 마구 뒤섞여 세상을 다 살아버린 맹수의 한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중현이 그렇게 검은색 기타를 품에 안고 세상의 저편 입구에서 고고하면서도 질펀한 블루스를 즐기고 있을 때, 그는 중현으로부터 구십 킬로미터쯤 떨어진 동두천의 어느 외진 농가에서 늦은 저녁을 만들고 있었다.
그날은 도라지로 차를 끓여내서 밥과 함께 먹었다. 목에 좋다는 음식들, 그러니까 목소리에 좋으면서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도라지나 무즙 같은 것을 그는 즐겨 먹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그는 집 마당에 내놓은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삼십 분 정도의 명상을 했다. 명상을 마치자 그는 눈을 떴다. 그의 명상은 노래를 떨치기 위한 것이었다. 노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잊는 삼십여 분을 지나 그는 겨우 노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명상이 두 시간을 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는 그날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뜬 그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도’ 음을 냈다. 길고 길게 도가 울려 퍼졌다. 도는 테두리를 가진 직선적인 음으로 시작해 점차 넓어지면서도 옹골차게 소리를 내뿜었다. 그의 호흡은 길었다. 발성이 좋은 데다 목소리의 톤도 아주 안정적이었다. 거기에 호흡까지 길다 보니 하나의 톤만 뱉어내도 한 곡의 노래 같았다. 하나의 음이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그는 그것을 모두 들려주고 있었다.
어쩌면 들려준다는 동사는 겸허한 것이었다. 그는 어떤 환영과도 같은 기억을 하나의 음 속에서 떠올렸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 멀었던 들판의 끝과 솟아오르다 내려앉은 밥 내음의 군락들, 그리고 예쁘고 어린 여자의 얼굴을 보여준다. 교복 상의를 고쳐 입고 공장으로 가던 날,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의 붉은 고구마가 입 속으로 들어온다. 그는 ‘도’를 멈춘다. ‘도’ 속에 아버지의 눈이 보였다. 아버지의 눈은 사라지고 눈두덩의 빈자리가 보였다. ‘레’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노래를 불러야지, 노래를 불러야지. 아, 아, 아, 그는 노래를 부른다. ‘레’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레’는 쉽게 멈추지 않는다. ‘레’는 즐겁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가난하지만 ‘레’는 즐겁다. 그는 다짐한다. 즐겁기를 다짐하면서 ‘레’를 거두어들였다.
그날은 일이 없었다. 일은 그가 노래를 수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 없이는 음식을 살 돈이 생겨날 수 없었고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목소리에 힘을 주기 위해서, 또 긴 시간 연습하기 위해서 반드시 좋은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아름다운 소리엔 힘이 필요했다. 힘이 있을 때 절제는 쉬웠다. 힘과 절제, 그 균형이 노래를 살아있게 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는 보일러 수리공이었다. 다른 일, 그러니까 여러 가지 다른 일도 해 보았지만 보일러를 수리하는 일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보일러실에 앉아 노래를 부르면 수련도 되지만 시름도 한 자락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곳은 지신의 뱃속인지 늘 따뜻했다. 그렇게 그는 살았갔다.
그 또한 공업학교에서 기술을 배운 기술자였지만 다른 기술자의 일을 돕는 역할만을 했다. 일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노래가 삶의 중심이기 때문이었다. 졸업할 무렵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도 커져서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을 노래를 부르는 것에 집중시켰다. 차츰 하루를 벌어서 하루를 수련하는 처지가 되어갔다. 규칙적인 연습을 위해서는 그에게 매일 일당을 주는, 매일 고장이 나는 규칙적인 기계가 필요했다. 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몇 날 며칠이 걸리는 새집의 공사는 피했다. 매일매일의 수련은 그에게 철칙이었으므로.
중현은 그날 밤을 지나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기타를 내려놓지 못했다. 당장 새로운 멜로디가 떠오를 것만 같아서 기타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안고 있던 기타를 가까스로 내려놓은 중현은, 밴드를 결성하기 위한 세부적인 스케줄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삼십 년 지기 프로모터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운 밴드와 음반에 대한 계획을 얘기했다. 통화의 말미에,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다시 덧붙였다. 새롭게 만드는 이번 팀으로 여한 없는 마지막 앨범을 내자고.
중현은 음악적 방향성을 명확히 했다. 새로운 밴드와 출시하게 될 새로운 앨범은 사실상 헌정 기타를 위한 앨범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중현은 기타 사운드를 올곧게 살려서 보컬과 서로 즉흥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음악적 방법론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너무도 즉물적이고 심해만큼 깊은 헌정 기타의 톤으로 한국적인 블루스를 완성시키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중현은 기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오직 기타에만.
중현이 미 8군 무대에 데뷔한 이래 온갖 세파를 겪으며 결성했던 밴드는 무려 열세 팀이었다. 그중 아홉 팀에서 중현은 기타를 치면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 직접 불러야 직성이 풀렸다. 직접 부르지 못할 때 중현은, 보컬리스트를 훈련시키고 지도했다. 그 지도는 단순한 교수법으로 불가능했다. 중현은 그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 그 구체적인 예술에 맞도록 보컬을 일치시키는 것이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노래에 대한 문화적, 음악적 저변은 물론 어느 정도의 기교 또한 갖추고 있어야만 밴드마스터로서 중현의 고집이 의미가 생겼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고집이 완고해지고 있다는 것을 중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1970년대 앨범에 대한 복각 붐을 타고 자신의 앨범을 복각하는 작업을 직접 할 때 중현 외의 모든 조력자들이 중현이 만드는 음향에 강하게 반대했다. 중현이 복각 기술자를 움직여 만들어낸 CD는 콘트라베이스와 드럼의 저음이 거의 없었다. 결국 다시 복각해 재출반 했다.
그렇다고 해서 중현이 의기소침해진 것은 아니었다. 기타 연주에 보다 더 집중하고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동두천의 그는 ‘미’를 마스터했다고, 신중하게 판단했다. 자신에 대한 판단은 그르칠 때가 있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가 제대로 수련을 시작한 지 약 15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하나의 음을 평균 5년 동안 연습한 셈이었다. ‘미’는 4년 반 정도 걸렸다. 그는 ‘레’를 다시 마스터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과거 ‘레’를 마치고 ‘미’로 들어가고 난 후에야 ‘레’를 마스터한 것이 아니다고 깨달았을 때의 낭패감을 그는 떠올렸다. 다음은 ‘파’였다. 마침내 그는 반음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노래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굉장히 독특한 수련법에 안착했다.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인생 전체를 채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으로부터 몇 년이 지나 그는 또 하나의 세부적인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때에도 그의 노래실력은 보통사람들보다 월등했다. 소질이 있었던 데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 인성을 가진 그였다.
이 수련법은 독특한만큼 간단했다. 하나의 음을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난 후에야 다음의 음을 수련하고 마스터하는 식이었다. 그는 이 독특한 수련법을 예술가가 걸어야 할 바른 길로 받들었고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의 실험적 소설 쓰기처럼 자신의 노래를 언젠가는 반열에 올려놓고야 말 것이라 믿었다.
그 자신이 이해하기로는, 그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다른 목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