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60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의 모차르트(W. Mozart)는 유명했고 나는 그 모차르트를 즐겨 듣고서 깊은 감명을 받고는 했다. 그러면서 자랐다. 자라서 서른이 되었다.
서른이 된 해의 3월, 그러니까 그 금요일의 퇴근길에서 나는 그만 난생처음으로 하스킬의 모차르트가 아닌 하스킬의 슈베르트를 깊게 들었다. 연주도 연주였지만 하스킬이 짚어 낸 그 소리가 툭하니 가슴을 찔러왔는데 그건 정말 마음속 모든 것을 지워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슈베르트(F. Schubert)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도이치 넘버 960번. 1951년 파리의 한 스튜디오에서의 하스킬. 그녀는 어제 있었던 일을 들려주듯 수더분하게 건반을 눌렀다.
안식과도 같은 음향을 들려주었던 하스킬의 그 시디(CD)는 참 인상 깊다.
스물셋, 제대하던 해였고 늦겨울이었다. 복학을 앞두었던 나는 마냥 집에서 뒹굴대는 게 좋았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미래를 걱정하던 누나의 종용을 이기지 못해 새벽부터 영어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영어회화반이라는 것이 해도 뜨기 전에 좁은 강의실에 모여 앉아 외국인이 불러주는 말들을 반복해서 따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게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든 나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누나 몰래 학원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누나의 눈 때문에 알록달록한 영어 교본을 챙겨 들고 새벽이면 꼭꼭 집을 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는데, 찬 기운이 누그러진 새벽바람 탓이었던지 음악이 몹시 듣고 싶은 거였다. 나는 몇 시간이나 시내를 서성이면서 대형 레코드 가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청음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하스킬의 그 시디 모음집을 보았다. 곱게 나이 든 하스킬의 초상이 담긴 재킷이 마음에 들었고, 매끄러우면서도 두툼한 재질의 종이박스 속에 띄엄띄엄 엘피(LP)로 듣던 연주들은 물론 엘피에도 없던 흔치 않은 음원들까지 차곡차곡 들어 있는 것이 좋았다. 꼭 가지고 싶었고 두고두고 듣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주머니엔 누나에게서 받은 다음 달 수강료가 들어 있었다.
그렇게 가지게 되었던 것이 바로 필립스사에서 나온 ‘하스킬 더 레거시 볼륨 3 솔로 레퍼토리(Haskil The Legacy Volume Ⅲ Solo Repertoire)’였다. 그 시디 모음집을 사들고 온 날 밤, 나는 그것을 듣지 않고도 행복했다.
석 장의 시디였다. 스카를라티(D. Scarlatti)와 모차르트, 라벨(M. Ravel)이 든 첫 번째 시디와 슈만(R. Schumann)이 수록되어 있던 두 번째 시디는 끼고 살다시피 했다. 그 두 장의 시디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였던지 베토벤(L. Beethoven)과 슈베르트를 담은 세 번째 시디는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 세 번째 시디를 우연히 듣게 된 날이 시디를 가진 그날로부터 무려 7년이 지난 어느 금요일 퇴근길이었다. 출퇴근길에 들으려고 차에 가져다 두었던 열댓 장의 시디들 속에 하스킬의 그 모음집이 있었다.
하스킬의 슈베르트를 깊게 들은 그날 밤에, 나는 나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네 인생은 하스킬의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아름다우냐?’
나는 그 모음집의 해설서를 몇 번이고 곱씹듯 읽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인생역정의 험난함만큼이나 아름다웠던 하스킬의 사진 몇 장이 연대기에 따라 들어 있었다.
어린 하스킬의 눈에서는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루마니아 태생의 유태인이었던 하스킬의 그 귀기는 세포 경화증이라는 불운에 의해 위축되고 나치(Nazis)에 의해 꺾이다 만년에 이르러 다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스킬은, 콘서트를 열기 위해 들른 브뤼셀의 한 기차역 계단에서 실족하는 바람에 숨지고 만다. 하스킬의 나이 예순다섯이었다.
하스킬은 만만찮게 기구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였고, 나는 그런 하스킬의 모차르트로부터 위로받아 젊은 날의 아린 상처들을 겪어낸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계기란, 하스킬의 슈베르트뿐이었다. 그 금요일의 밤에 나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다음 달, 봄 냄새가 봄동의 속살 같이 익었을 무렵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때는 온 세상 경제가 퍽이나 잘 굴러가서 내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외에는 별달리 걱정이 없었다.
누나는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부터 완강하게 반대했다. 누나와의 수차례 다툼 끝에 내 결심을 실행에 옮겼을 땐 회사를 그만둔 지 5개월이나 지난 후였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브람스 레코드는 그렇게 탄생했다.
브람스 레코드에서는 시디도 팔고 엘피도 판다. 새것도 팔고 중고도 판다. 가게에서도 팔고 인터넷에서도 판다. 클래시컬도 팔고 재즈도 판다. 레코드도 팔고 책도 판다. 책이란 몇 권의 시집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열댓 권쯤 가져다 놓고 판다. 슬픈 시들은 잘 나간다. 여자 직장인이나 여대생이라도 들르면 나는 곧잘 시집을 팔아넘긴다. 그중 잘 나갔던 시집은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기억한다. 아, 그리고 얼마 되진 않지만 국악음반도 판다. 지금도 젊은 소리꾼들이 부른 눈대목이나 명인들의 산조를 담은 시디들이 스무 장 남짓 구비되어 있다.
브람스 레코드라는 이름은 내가 지은 것이다. ‘하스킬 레코드’라고 지을 뻔했다. 그런데 누나가 반대했다.
“하스킬이라니……, 킬이라는 게 그다지 어감이 좋지 않구나.”
누나는 하스킬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하스킬의 이름인 ‘클라라’를 써서 ‘클라라 레코드’로 이름 지었다면 누나가 선뜻 동의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별 후회가 없다. ‘클라라’는 끝내 브람스(J. Brahms)의 사랑을 뿌리친 클라라 슈만을 연상시켰으니까.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우정으로 대체될 수 있단 말인가. 슈만이 자신의 음악만큼이나 그럴듯한 남자였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순정파 브람스가 좋기도 했고 브람스의 음악도 즐겨 들었지만 무엇보다 브람스라는 이름의 어감이 좋았다.
그 이름 탓만은 아니었겠지만 브람스 레코드는 개업 이후 번창해서 지금은 온라인에서도 이름난 음반 쇼핑몰이 되어 있다.
덧니 소녀
당대에 손꼽히는 천재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하스킬은 죽기 얼마 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콘서트용 그랜드 피아노를 장만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개업하자마자 값비싼 오디오를 가게에 들여놓았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그 오디오세트는 가게의 한쪽 모퉁이에서 매혹적이고도 편안한 소리들을 만들어주었다. 뜻하지 않게 마음이라도 차오르는 날이면 틈이 난 내 감정들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었다고 할까, 내게는 달콤했던 어린 날들의 추억과도 같은 존재였다. 훌륭했던 만큼 다루기 까다로웠던 그 기기들은 지금 여기에 없다. 어떤 날은 그 소리가 그립다. 덧니 소녀가 그리운 만큼이다. 딱 그만큼이다.
나는 가끔 브람스 레코드의 홈페이지에 마련해놓은 자유게시판에 몇 마디를 끼적인다. 라디오를 듣다 말고 그 감흥을 적어내는 것이다.
당신은 이국의 언어를 알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정말 많은 언어가 있다고요.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은 연주자가 아니라 이국의 언어에 능통한 30대 초반의 남자랍니다. 그는 토요일 밤에 음악을 들려줍니다. 많은 기억들이 서로 엇갈립니다. 하나의 언어 속에서도 엇갈립니다. 종잡을 수 없는 죄악들과 슬픔들, 그리고 새로운 언어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말합니다. 이별을 잘하면 아름다운 사랑을 가질 수 있다고요. 하지만 이별을 잘하기가 어디 쉽나요? 사람들은 똑같은 언어로 반문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잘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별을 잘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월요일 저녁 당신을 만나 당신의 가슴을 만지고 당신의 입술을 탐하며 당신의 발끝을 간질이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랑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지독한 것입니다. 이봐요 디제이 아저씨. 이거 뭐 하자는 겁니까? 이별을 절대 하지 말라니요? 아직은 추운 3월에는 그녀를 따뜻하게 지켜주라니요? 조금 전의 말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월요일은 어떤 날씨가 될지 모른답니다.
그날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 글을 브람스 레코드 홈페이지에 써 내려갔던 토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시벨리우스(J. Sibelius)의 두 번째 교향곡을 시디플레이어에 집어넣고 있었다. 전통 깊은 영국산 시디플레이어는 덜거덕거리며 트레이를 끌어당겼고 윙윙 소음을 뱉어내면서 데이터를 읽어나갔다.
그때였다. 한 소녀가 우산을 접으며 뛰듯이 가게로 들어왔다. 소녀는 두세 권의 악보를 한 손으로 품고 있었다. 큼지막한 손이 두드러졌다.
내 앞으로 다가온 소녀는 웃고 있었다. 덧니, 그래 덧니였다. 통통한 얼굴에 덧니가 보였다. 꽤 긴 머리칼은 질끈 동여맸었나 보다. 까딱 하고 인사를 하더니 소녀는 다시 가게 입구로 가 한 손으로 겨우 우산을 갈무리해 우산꽂이에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서 진열대를 휙휙 둘러보았다.
나는 소녀의 등을 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소녀가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녀는 금세 안녕히 계세요, 라는 인사말만 희끄무레하게 남기고 연두색 땡땡 무늬 우산을 펴고서는 비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가버렸던 것이다. 소녀가 들었다 놓은 시디는 아르투르 베네디티 미켈란젤리(A. B. Michelangeli)의 드뷔시(C. Debbusy) 전주곡집 제1권이었다.
가게에는 아련한 기운이 남겨졌다. 진열 테이블 위에는 바흐의 악보들이 놓여 있었다. 소녀의 것들이었다. 봄비 위에 다시 비가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3악장 4악장을 끊김 없이 내달아 가고 있었다. 존 바비롤리(J. Barbirolli)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리는 비가 바닥에서 얼어붙어버리는 건 아닐까 싶게 그들의 연주는 차가웠다. 나는 새로 들여온 시디들을 그냥 둔 채, 마냥 앉아 시벨리우스를 끝까지 들었다. 1962년 10월 런던에서의 연주였다. 가을날 런던이라니, 스산함이 대단했다. 재킷은 북구의 눈 내린 포구였고, 가게 밖은 어둑어둑한 비 내리는 거리였다.
다음날에도 차갑고 세찬 비가 내렸다. 봄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볼륨을 높였다. FM 라디오에선 탈리아비니(F. Tagliavini)의 착색된 듯 달콤한 아리아를 내보내고 있었다. 나는 낡은 노트북에다 글 나부랭이를 한 자 한 자 쳐 넣고 있었다. 도저히 끝까지 듣기에 힘들 정도의 감미로운 테너가 마무리될 때쯤 전날의 그 소녀가 문을 밀면서 다시 가게로 들어왔다.
웃음, 덧니, 그리고 목례. 소녀는 시디 진열대에서 전날 집어 들다 말았던 미켈란젤리의 시디를 집어 들었다. 소녀는 돌아섰고 내게 시디를 내밀었다. 만 원짜리 두 장과 함께. 소녀의 손에 있던 전주곡집은 소녀가 다시 거두었고, 나는 거스름돈을 소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바비롤리의 시벨리우스를 소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사은품입니다. 듣던 것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대사였다. 소녀는 머뭇머뭇 시디를 받아 들었다.
“엘피는 들으세요?”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가만히 시벨리우스를 유리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덧니를 보이며 싱그럽게 웃었다. 나는 소녀가 놓고 갔던 바흐의 악보들을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연습
“우와, 첼로 소리 좋다. 역시 라이브니까.”
음대의 유서 깊고도 운치 넘치는 골목을 헤쳐 나가면서 내가 말했다. 음대에는 여대생이 많았고 수많은 여대생 사이를 빠져나가는 건, 거듭하다 보니 썩 좋은 재미였다. 소녀가 대답했다.
“저건 비올라 소리예요.”
‘아, 그렇구나!’
시내 외진 골목 안에 자리한 브람스 레코드는 직장인 손님이 많은 편이라 퇴근시간 이전에는 한산한 편이었다. 그 덕에 나는 소녀가 수업을 일찍 마치는 날이면 오후 무렵 소녀가 다니는 음대의 연습실로 숨어들 수 있었다. 다섯 정거장, 가게에서 연습실까지 가는 그 시간이 나는 행복했다.
연습실 건물에는 고시원처럼 각이 진 방이 가득 차 있었는데 1층에는 큰 풍금처럼 생긴 오르간들이 있었고 2층과 3층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는 방이 많았다. 4층에는 피아노는 없이 보면대(譜面臺)만 있는 방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연습실 앞 널따란 정원에 있던, 한때는 파란색이었을 하늘색 벤치. 빛이 바래고 페인트가 벗겨진 그 벤치에 앉으면 온갖 리듬의 피아노 소리와 각자의 피아노를 대동한 소프라노, 테너, 알토, 바리톤, 베이스, 메조소프라노, 그리고 그 사이사이 예고 없이 등장하는 바이올린과 첼로, 콘트라베이스, 트럼펫, 클라리넷, 거기에다 오르간의 장대함까지 겹쳐진 전위적인 음향이 들려왔다. 나는 그 벤치에 앉아 바흐(J. S. Bach)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를 한꺼번에 감상하며 이른 오후의 달고도 곤한 잠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그곳 연습실에서 소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봄날부터 시작해 찌는 듯 더운 여름을 거쳐 늦은 겨울까지, 나는 학생이 되었고 소녀는 선생님이 되었다.
연습실은 제각기 독립된 공간이어서 데이트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과할 정도로 열심인 선생이었고 나는 굼뜬 데다 집중력 없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 연습실에서의 수업이란 때로 소녀의 연주를 듣는 감상의 시간이었다. 어떤 날은 소녀를 졸라 유행하는 가요나 재즈를 청해 듣기도 했다. 소녀는 손사래를 치며 조심스러워했지만 무턱 댄 나의 요구에 대부분 응해 주었다.
마음속으로야 소녀의 열정적인 순간들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내 피아노 실력은 아주 형편없었다. 소녀가 두 대의 피아노용으로 편곡된 차이코프스키(P. Tchaikovsky) 협주곡의 연습용 악보를 펼쳐들 때마다 나는, 내가 피아노를 쳐서 반주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내 피아노 실력을 원망했다.
늘 진지하게 연습에 임했던 소녀는 땀을 많이 흘렸다. 타건 때문이었다. 소녀의 몸이 강렬한 음향으로 둔갑하는 순간 소녀의 땀이 귀밑으로 흘러내리곤 했다. 특히 라흐마니노프(S. Rachmaninov) 같은 낭만주의 시대의 곡을 연습하는 날에는 땀을 더 많이 흘렸다. 나 역시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기도 했지만 송골송골 맺히는 소녀의 땀이 싫지 않았다. 땀 냄새는 서로 조금 달랐다. 내게서는 나의 냄새가 났고 소녀에게서는 소녀의 냄새가 났다.
우리가 연습을 마치고 아직 어스름한 저녁으로 나오면 사람들은 땀에 푹 젖어 있는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고는 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안개 자욱한 봄날의 새벽녘처럼 몽롱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