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겨울 너무도 오랜만에 광화문에 갔다. 아내와 딸은 목적대로 전시회를 보러 들어가고 나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전시회이기도 하고-지브리 전시회였다-입장료도 조금 부담스러워서 인근의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2층에서 전문 바리스타 몇 명이 주문을 받고 있었는데 그때 어떤 커피를 주문했는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아마도 하리오식 드립으로 뭔가 스페셜티를 주문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아주 맛있게 커피를 마셨던 기억은 난다. 그리고 기억이 하나 더 떠오른다.
사진은 사진기로
어떤 노신사가 자리를 정리하며, 카메라를 꺼내 들고 창밖의 거리를 찍고 있는 나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내 카메라로부터 내 얼굴로 옮겨왔다.
노신사가 말했다, "멋진 사진, 잘 찍으시우!"
다른 어떤 날 그는 스마트폰으로 거리를 찍고 있는 젊은이가 못마땅했을지도 모른다. 사진을 사진기로 찍고 있는 내가 귀여워 보였을까.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솔직하게 말해서, 약은 '반드시' 약사에게, 진료는 '반드시' 의사에게 물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대체로 맞다고는 생각하고. 그렇긴 한데
이런 구분이 곧 '아날로그'라고, 나는 생각해버렸다.
사진은 사진기로 찍고, 약은 약사에게 타고, 진료는 의사에게 받고, 집안일은 아내와 상담하고, 자식 교육일은 선생님과 상담하고, 내 알코올 중독 문제는 재혁이에게 털어놓고,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은 나 자신에게 하고, 창업 문제는 동훈 선배나 진혁 선배에게 배우고, 인생의 방향 문제는 상호 형과 논의하며, 연봉이나 퇴직금 문제는 이 대표와 옥신각신해야 한다. 가령,
전에 다니던 회사의 대표인 동진이에게 부동산 고민을 토로할 수는 없고, 갑자기 끼어들어온 차는 저 멀리 가버렸는데 조수석에 탄 사람만 듣게 되는 쌍욕을 소리 높여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
레인지 넓게 무엇이든 연결해서는 해결해준다는 디지털 애플리케이션들의 만족도는 만점이 될 수 없다.
비유의 비약이긴 하지만, 커피를 레스토랑에서 마시지 않고 커피숍에서 마시는 것이 내게는 아날로그'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그런 '아날로그 타입'-그런 본연적인, 혹은 본질적인 연결-을 나는 매우 선호한다.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변태들의 스마트폰 캡처는, 아날로그 타입의 세상이라면 벌어지지 않을 일 아닐까. 나야 동성 간의 사랑이나 결혼을 도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문제없다고 간주하지만 그것 또한 아날로그 타입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가치중립적인 의미로 '혼종과 크로스오버, 퓨전'이라면 그건 디지털 시대의 트렌드다.
나는 그저 아날로그가 좋다.
LP가 아닌 CD라도 CD 전용 CD플레이어에서 트레이가 나와서는 CD를 뱅뱅 돌리니까, 또 그게 좋고 아날로그 타입이라고 생각해버린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걸어가거나, 우산을 사 쓴다든가 늘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날로그 타입, 러시아의 기술로 비구름을 만들고 조정하고 이동시켜서 기후를 조작하는 것은 디지털 타입이다. (기후에 있어서는 대부분 아날로그 타입인 것 같긴 하다.)
인도의 음식은 아날로그 타입 천지다. 거기에선 '향신료 No. 13' 같은 것이 없다. 양산화되고 공산화된 향신료가 없다는 말이다. 수많은 향신료를 나름의 감각으로 블렌딩 해서 요리를 하는 아날로그 타입의 셰프들이 있을 뿐이다.
세상이 뒤죽박죽이다.
독서는 눈에게 맡기고, 음악 감상은 귀에게 음식의 맛은 혀에게 맡기자. 그리고
생은 생에게 맡기고 죽음은 죽음에게 맡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