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범인을 알고 있다

스포일러

by 현진현

책을 한 권씩 산다는 건 특별하다. 그 책에 특별함이 담긴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리고 서점으로 걸어가서 긴 시간 책을 뒤적인 다음 골라오는 책도 특별하다. 내가 기억하는 서점에서의 첫 책은 놀랍게도 '소크라테스의 변명'이었다. 누나로부터의 용돈으로 샀으니까 1988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 낮에 문득, 초등학생 시절에도 책을 모았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 딱 한 번, 책의 표지를 넘긴 자리에 '범인은 노먼 게일'이라고 써 두었다. 그 추리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첫 장으로 돌아와 무심코 그렇게 써 두었고 나중에 막내 고모부가 내가 모았던 스물몇 권의 아가사 크리스티를 모두 가져갔을 때 나는 그 노먼 게일을 써 둔 게 기어났다. / 고모부가 책을 모두 가져가 버려서 지금껏 초등학생 시절의 책을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 / 그건 그렇고 범인은 정말 한 권의 값어치일까? 우린 범인을 미리 알고서 책을 읽는 것은 아닐까? 신기하게도 '노먼 게일'이라는 이름을 지금에 이르러 기억 해내버린 나는 누구일까? 그런데 그 범인으로 등장한 그 소설의 제목은 왜 떠오르지 않을까? / 초등학생인 나야말로 아주 많은 책을 읽었고 그 책들의 결말을 알고 읽는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책은 이미 써졌고 활자화되어서 그랬던 것 같다. 범인이 노먼 게일이 아니어도 문제는 없다. / 하지만 알고도 모른 척해서는 안 되겠지. 알고도 재미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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