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a Schrader, Unorthodox
낮을 맞이하고 보니 더 수긍하게 된다. 어젯밤만 해도 '조지 버나드 쇼'가 내뱉은 수많은 말 중에 "위스키는 액체에 녹아든 햇빛이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심이 뜨뜻했거든. 요즘 들어서는 좀처럼 그렇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햇빛 말이다. 햇빛이 위스키의 주변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궁금해졌다는 이야기. 나는 그게 너무 햇빛 같아서.
퇴사를 한 지는 대략, 8개월쯤 되었다. 퇴사를 즈음하면서 코로나가 발생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얻어 든 사무실과는 점점 멀어졌다. 밖으로의 출근보다는 베란다 한편에 작은 책상을 두고, 피아노로 경계를 만들었다. 피아노는 건반도 있지만 건반 덮개도 있어서 보조 책상으로도 아주 훌륭하게 사용한다. 건반 위의 보면대는 노트북 쿨링 받침대로도 아주 좋고. 재택근무는 전체적으로 즐겁고 가끔은 무료했다. 그랬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예상과는 달리 마치 더 높이 나는 새처럼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게 된 것도 같다. 재택근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일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퇴사를 맞이하고 보니 농담 말고 정말 '자유'에 대해서 깊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퇴사 계획을 2년 정도 세웠다. 마지막 다닌 회사는 6개월 계약직을 내가 원했다. 하지만 1년 반을 다녔다. 퇴사 시점에서는 자의적인 퇴사인지 해고되는 건지 좀 헷갈리기도 했다. 내가 직장생활이라는 항공모함에서 퇴사를 결정한 이유 중에 밝힐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자유'였다. 퇴사와 자유를 이야기하면 그렇고 그런 얘기 정도가 되겠지만 코로나 시대의 퇴사는 지난 8개월 동안을 마치 10여 년처럼 압착해서 짜 낸 농축액이나 즙 같기도 하다. 내 옆엔 한창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고 건실하게 주부 역할을 해내는 아내가 있다. 그 틈 속에서 빛처럼 찾아낸 것이 어쩌면 '자유'였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이 자유가 요사이 조금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그런 자유는 아니었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곤란했던 그런 자유. 놀랍게도, 나는 이 '자유'를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자유'라고 느낀다. '이 회산 생각까지도 제약한다니깐~'하는 그런 자유가 아니라 다시 말하지만, 나 자신을 인간으로 느끼게 해주는 자유이다.
'에스티는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윌리엄스버그를 떠나서도 그렇다.' 넷플릭스의 4부작 '이단(Unorthodox)의 테마인 '자유'를 설명해주는 스테이트먼트다. 내 회사의 자격으로 다른 회사의 업무 요청을 받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 요청에 정확하게 반응하고자 한다. 그것이 퇴사 이후의 자유다. 책임성이 더 강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담이 덜어진 상태의 책임만을 가진다. 에스티는 '음악'이나 '피아노' 같은 단어들과 뱃속에 아이를 품고 윌리엄스버그를 떠났다. (이 4부작은 줄곧 윌리엄스버그와 베를린의 교차로 이루어지는데 촬영은 대부분 베를린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타령조로 슈베르트의 959 2악장을 치고, 메조소프라노지만 소프라노의 음계로 An die Musik를 부른다. 나는 거의 매일 집 근처 학의천으로 긴 산책을 다니면서 업무를 계획하고 브레인스토밍을 한다. "인도어 라이프 시대의 전문 타깃"인 아내에게 시안을 시연하고 의견을 구한다. 온갖 음악을 듣거나 아내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어떤 날은 하루 네 번까지 짧은 거리 운전을 한다. 아이를 태워서 학원가를 왔다 갔다 하는 일이다. 역시, 돈을 벌어들이는 것 말고도 '가족을 위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자유를 느낀다.
낮을 맞이하고 보면 낯이 뜨거운 정도를 느끼면서 슬슬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었다. 퇴사를 하였으나 자유가 없었던 시절이 꽤 있었다는 것. 아내도 묻지 않는 경제생활에 대한 것을 친구가 질타했지만 나는 가볍게 응수할 수 있었다. "걱정 마, 열심히 일하고 있어." 할부로 질러대는 헛헛함이나 청빈하게 살아가는 헛헛함이나 그게 그것이라는 것도 이제 와서 알게 되었다. 가진 게 너무나 많아서 발견으로 질러대는 요즘 내 삶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한 지경. 뭘 이렇게 많이 사들여뒀을까 하는.
마이라 슈레이더는 배우였고, 이 4부작을 감독했다.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에스티가 여전히 신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감동적이다. 직장생활이 싫다고 업무가 싫은 것이 아니다. 위스키는 정말 햇빛을 담고 있어서 생각을 하기에 언제나 맑은 정신을 선물해주는 것 같다. 비교적 저렴하고도 차별적인 몇 가지 스카치, '맥켈란 12' '시바스 리갈 12' '글렌리벳 파운더스 리저브' '발베니 12'에게 경의를 표한다. 맥켈란 셰리 오크 캐스크의 독특한 바닐라는 죽어서도 못 잊을 것 같다. 퇴사의, 밝힐 수 있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혼자 마시는 술'이었다. 베란다 한편에 앉아서 위스키 한 모금을 쥐고 내 삶을, 그리고 세상을 명상해보라.
혼자서 햇빛을 목 너머로 흘려보내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그저 혼자 마시면 당연히 스카치겠지, 하고 생각했을 뿐. 이 보다 더 광대하고 밝은 자유는 없을 거다.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