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행복했던

by 현진현
Zagrev, 2015년


돌이켜보면,

내가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은 별거 아니었지.


- 여보 두부 좀 사 와요!

주말 아침 아내가 심부름을 시키면

되게 마음이 배불렀다.


-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심야에 안방 문 언저리에서 아들녀석이 인사하면

그게 그렇게 좋았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비상구 안내 영상이 나올 때

그냥 좋았다.


김사월의 '수잔'을 처음 들었을 때도 행복했지.


여인의 뒷모습을 보면 이유 없이 행복했다.


- 다음 달부턴 제게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회사에 사직서를 내는 순간도, 어찌 보면 짜릿했다.


서점에 막 들어섰을 때, 도서관에 막 들어섰을 때

미치지.


차가 잘 미끄러져나갈 때도 행복했고


- 꼭 행복해야 해?

라고 누군가에게 되물었을 때도 행복했다.


불법으로 다운로드한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극장 가서 다시 봤을 때도 가슴이 든든해졌다.


누군가를 데리러 가는 길이 행복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도 행복했다.


내가 과감하게 개인적인 인간이란 사실에도 만족했다.


누군가 내가 참여해서 만들었던 광고 얘기를

해주면 정말 좋았다.

(세탁기 사러 갔다가 영업사원이 보여주던 영상이

내가 만든 거였어.)


- 아빠 뻥치지 마!

내가 만든 광고를 아이가 믿지 않을 때 정말 행복했고


- 여보 그만 해!

아내조차도 믿지 않을 때 너무 행복했지.


저주받은 걸작, 칸타타를 탈고하고 난 후

정말 후련했어.


이렇게 타 다다닥, 키보드를 누를 수 있는 것도

참 행복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책,